박성제 <문화방송> 해직기자가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문화방송 본사 앞에서 공정한 방송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언론들의 취재경쟁이 뜨거운 가운데 여전히 청와대에 앵글을 맞추는 <문화방송>(MBC)의 기자들은 취재 현장이 두렵다. 시민들의 “너흰 왜 왔어? 당장 꺼져” “월급받는 게 부끄럽지 않냐”는 모욕과 냉대 속에 쫓겨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여의도를 떠나 초현대식 건물의 상암동 시대를 열었지만 많은 구성원들은 ‘외화내빈’의 빈껍데기라며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권력을 매섭게 비판하던 <뉴스데스크>와 <피디수첩> 등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회복 불능의 길로 접어든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 12일 100만명이 모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문화방송은 로고 없는 중계팀 버스 위에서 ‘MBC’ 태그를 뗀 마이크를 들고 보도에 나섰다. 하지만 보도 내용은 부실했고 꼭지도 8건에 그쳤다. 이날 일부 종편은 촛불집회 내내 생중계했고, 지상파 방송인 <에스비에스>(SBS)와 <한국방송>(KBS)도 특집편성을 하며 각각 34건, 19건을 보도했다.
16일 서울 상암동 문화방송 본사 앞에서 ‘청와대 방송 중단하라’ 1인 시위에 나선 박성제 해직기자는 “2008년 촛불정국 때만 해도 취재 현장에 나가면 문화방송 기자들에게 시민들이 ‘수고 많다’며 음료수를 건네는 일이 많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찬 시기였다”며 격세지감과 함께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당시 문화방송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문제 삼은 피디수첩과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뉴스들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한국기자협회가 해마다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 문화방송은 2010년까지 방송 가운데 신뢰도 1위였으나 2013년 이후엔 순위를 모를 정도로 밀렸다.
12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문화방송> 기자가 ‘MBC’ 태그를 뗀 마이크를 들고 보도하고 있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요즘 문화방송 보도국 게시판엔 시청률 3%대 <뉴스데스크>의 추락을 거론하며 “이러려고 기자된 게 아닌데”라는 자괴감과 부끄러움, 참담함을 토로하는 글들이 잇따랐다. “너무 힘들고 너무 슬픕니다.” “아무것도 취재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허망합니다.” “‘방송도 안 낼 거 뭐하러 찍어 가냐’는 시민들의 냉소와 조롱이 가슴을 후벼팝니다.” 기자들은 이 시대 죄인이라도 된 듯 답답한 심정을 분출하며 취재력 복원을 위해 비보도국으로 쫓겨난 선후배·동료들의 복귀와 책임자 퇴진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쪽은 묵묵부답이다. 이호찬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민실위 간사는 “한국방송이나 에스비에스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보도 참사’에 대해 보도책임자가 사과하거나 책임을 언급했는데 문화방송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지난 2일 보직간부 워크숍에서도 보도 관련 이야기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특종 행진을 하는 <제이티비시>(JTBC)를 보면 특히 뼈아프다. 시사교양국의 한 피디는 “제보는 언론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우리를 믿지 않으니 그리로 다 가는 것”이라며 허탈함을 드러냈다.
언론계나 학계에선 문화방송의 미래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비관적으로 변하고 있다. 지속적 물갈이로 우수한 인력들이 많이 내쳐졌고 이에 따른 내부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김재철 사장 체제 이후 해고·징계·전보된 자리를 메운 인력이 4년 새 100명 가깝다. 경영진은 불공정 보도 등에 항의하는 자들을 심의실 등 비취재부서로 내쫓았고 그 자리를 계속 시용·경력기자나 피디로 채웠다. 비판 기질의 언론인을 순응체제로 길들여놓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형국이다. 김성해 대구대 교수는 “언론은 철저한 인재산업이다. 문화방송은 김재철 사장 이후 엉뚱한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언론사가 권력 감시의 역할보다 윗사람 눈치 보는 조직문화로 바뀌었다. 직장문화가 크게 훼손돼 단기간 내에 이들이 갖고 있던 창발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건강한 조직문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언론사 수장이 절실하다. 안광한 문화방송 사장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이다. 사장 교체 시기에 간부들은 누구에게 줄을 설지 눈치를 보느라 정작 보도는 뒷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조능희 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장은 “문화방송을 망친 자들은 사장과 보도본부장 등 경영진이다. 거국중립내각이 들어서면 국정농단을 방조·방치한 공범인 언론들, 특히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수장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중립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언론을 위해 차기 사장 선임부터 절대다수제를 적용할 수 있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이 조속하게 통과돼야 하는 이유다.
문현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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