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했던 김주언 전 <한국방송>(KBS) 이사(가운데)가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 세미나: 한국의 언론 통제와 언론 자유, 30년의 역사를 짚다’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보도지침 폭로 30년이 흘렀다. 감옥에서 첫아이의 돌을 맞았는데 그 애가 벌써 서른이다. 짧지 않은 세월인데, 최근 공영방송에 대한 청와대의 보도 개입에서 보듯 보도지침이 과거가 아닌 현재 일로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어 참담하다.”
1986년 9월9일,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주언 전 <한국방송>(KBS) 이사는 전두환 정권이 언론에 일상적으로 내려보낸 사전검열의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이 ‘보도지침 사건’은 현직 언론인이 시민언론단체와 조영래·황인철 등 인권변호사와 연대했던 사건으로, 월간 <말> 특집호에 공개된 뒤 영어로 배포돼 앰네스티 같은 국외 인권단체와 미국 의회 등에서도 그의 석방운동을 벌이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도지침 폭로 30년을 앞두고 한국방송학회·한국언론학회·한국언론정보학회 공동주최로 24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의 언론 통제와 언론 자유, 30년의 역사를 짚다’라는 세미나에서는 언론 환경이 과거로 퇴행했다는 암울한 진단이 쏟아졌다. 디지털 추세 속에 경영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언론들에 대한 자본권력의 통제가 더 우려스럽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주언 전 이사는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당시 김시곤 한국방송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 비판 보도를 하지 말라고 압박한 데 대해, 청와대가 ‘협조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직접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30년 전 전두환 정권의 논리와 똑같다며 “보도지침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오늘날은 군사정권처럼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물리적 폭력은 없지만 언론인 해직 등 불이익을 받는 사례는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항제 부산대 교수는 보도지침을 권력과 언론 사이에서 정기적이고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비대칭적 상호작용의 일환으로 짚었다. 그는 “보도지침의 목적은 ‘불확실한’ 뉴스를 ‘확실한’ 지배의 틀 속에 가둬두려는 것이다. 보수가 아닌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관계가 저절로 해결될 것인가. 비관적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며 “정권이 바뀌어도 홍보수석 자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필모 한국방송 해설위원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며 민주주의만 실현되면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퇴직을 2년 남짓 앞둔 상황에서 열악한 언론 환경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있다.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려는 기자라면 일하기 어려운 사회”라며 “‘보도 협조’라는 이름으로 보도 통제와 정보 통제가 수시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30년 전과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영방송이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도록 직업윤리가 확보된 전문직주의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이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통제에 더 취약하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문소영 <서울신문> 사회2부장은 “권력과 싸우는 것은 선명해서 쉽다. 그러나 자본과의 싸움은 지난하고 답이 없다”며 “특히 삼성 관련 기사는 언론들이 광고를 의식해 눈치를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정현 녹취록’(6월30일)과 ‘이건희 동영상’(7월21일)이 사건 발생 뒤 1주일 동안 몇건 보도됐는지 조사한 결과, 145건 대 48건(언론재단 빅카인즈), 635건 대 333건(네이버)으로 나타났다며 “언론이 자본권력에 대한 보도를 더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 건수를 통해 확인됐다”고 밝혔다.
박홍원 부산대 교수는 “수익을 잘 내는 언론사가 공익성을 실천한다는 사례도 있다. 수익 창출이 어려워지면 언론의 공적 기능도 위협을 받게 된다. 밥벌이를 위해 협찬은 불가피하다는 언론에 공적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공적 펀드 등을 활용해 재원 확보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문현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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