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누적된 오래된 문제들을 일시에 드러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에서 보듯이 한 죽음에는 욕망과 증오를 포함한 서로 다른 기억과 망상이 녹아 있다. 갈등으로 엉켜 있을수록 언론이 시야를 넓고 깊게 키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평온한’ 일상의 폭력성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여성 대 남성’이라는 거친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사안이다. 사회의 안전망 붕괴, 소외집단에 대한 지원 부재, 젠더 불평등의 구조적 요인에 여성혐오라는 일그러진 심리가 얽혀 있다. 반면 복합적인 요인과 맥락에는 눈감은 채 사건의 외피를 좇는 취재·보도의 문제점이 신문 지면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고인에 대한 추모가 절정에 달했던 5월21일과 22일 동안의 <한겨레> 지면을 살펴보자. 전체 기사 지형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좋은 온라인 사이트의 첫 페이지를 기준으로 할 때 살인 사건 및 추모행사 관련한 몇 개 기사가 비교적 크게 다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여성이 등장한 기사는 손꼽을 정도다. 그나마 여성 해당 기사들도 “술 마실 때 담배 더 찾는 이유”의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매혹적인 여성, “‘역사 무지’ 이토록 몰매 맞을 일인가”의 설현과 지민의 딱한 모습 등을 담은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요컨대 지면 전체에서 여성의 비중은 매우 적으며 설사 여성이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용과 무관하게 성애화되거나 희화화된 이미지로 활용되는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더 이상 놀랍지 않은, 남성 중심적 언론 질서의 전형이기도 하다.
사회면의 하위 범주인 여성면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여성면의 최근 두 개 기사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관련된 보도이지만, 그다음에는 대체로 가볍거나 좁은 시야의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욱’하고 치밀어 오를 때 ‘꾹’ 참고 이렇게”라는 제목의, 워킹맘의 고달픈 현실을 다룬 기사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직장 내 차별을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전 <뉴욕 타임스> 기자인 레슬리 베네츠의 주장을 전하면서도 우리 워킹맘들에게는 ‘사표 쓰고 싶은 날엔 종이 한 장을 꺼내 사표 손익계산서’를 써보고 훗날 ‘여유롭게 웃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식으로 스스로 달래기를 권한다. 하긴 이처럼 개인적으로 삭이는 편이 현실적으로 영리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듯 ‘착하게 살아남기’를 권하는 기사에 선뜻 공감되지는 않는다.
여성 차별적인 담론 질서는 단지 <한겨레>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네이버 국어사전이나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여성혐오’ 단어는 누락되어 있다. 최근 2~3년간 혐오에 대한 체감 수치가 위험스러울 정도로 높아졌음에도 아직까지 우리에겐 그 현상을 사유하고 논의하기 위한 어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개념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불가능하며, 사유가 막힌 상태에서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평온한’ 일상이란 이렇듯 전면적으로 편재하는 불감증의 가면일 따름이다. 더욱이 우리는 여성혐오에 대해 분열적인 무의식을 가진 듯하다. 사건으로서 여성혐오는 분노의 대상이지만 오락으로서 여성혐오는 향유의 대상이다. 다수 관객의 사랑을 받은 한국 영화의 한 영역은 이유 없이 죽어가는 여성들과, 그녀들을 해치는 매력적인 남성 악인이나 구원하는 멋진 남성 영웅의 서사로 특징화된다. 이처럼 우리는 혐오 현상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공포를 즐기는 이중 심리를 익숙하게 체득, 실행하고 있다.
이항대립을 넘어서 공존의 가치로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한겨레> 기사들에서는 ‘정신분열자 대 여성 약자’라는 이분법이 내비친다. 또한 딸 가진 부모의 걱정, 언니들의 위로, 강남역 같은 서울 번화가에서 일어났기에 더욱 충격적이라는 시민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서울 중산층의 가족주의적 시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윤택한 생활공간의 외부(이를테면 낙후된 지역의 경제적 소외 계층)에 위치한 이들이 노출되어 있는 위험 요소는 간과된다. 여성과 남성의 대치 구도 역시 심각하다. 본연적으로 여성 또는 남성은 각자 단일한 집단으로 분리되어 획정될 수 없다. 남성들 사이의 차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있는 한편 여성과 남성 간에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통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잠재적인 가해자’라고 반성하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기사화되었는데, 나는 그 진정성에는 동감할지라도 시각 자체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애초에 구성원들이 성별에 따라 피해자(여성) 아니면 가해자(남성)라고 여기도록 만드는 사회란 건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한 취재보도 방식에 대해서도 제언하고 싶다. 기사의 대부분은 추모 현장과 해프닝 소개 및 거리 인터뷰에 의존하는 방식을 취했다. 추모라는 특별한 사건에 발동되는 사회적 감정 작용은 매우 강렬하지만 그만큼 휘발성이 강하고 일시적이다. 따라서 감정의 물결을 타는 안이한 관행을 넘어 제도와 상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거시적인 접근이 취해져야 한다. 이 혼란스러운 사건의 원인, 과정, 효과, 함의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이 요청된다. 예컨대 우세한 위치의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혐오와, 사회적으로 말단부에 버려진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혐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분별되고 각각에 적합한 사회적 처방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젠더 불평등과 아울러 사회경제적 빈곤, 문화적 시민권, 복지와 안전을 포함한 복합적인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여러 층위의 모순들이 응집해서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표출되었을 때, 살인을 한 그 누군가-그가 가난하고 심신이 병들었다면 더욱이-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일은 어쩌면 가장 ‘간편한’ 해결 방법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한 취약한 인간에게 투과하고 처벌하는 것만으로 일이 해결된다고 믿는 태도는, 정신분열자가 사회에 대한 모든 증오를 여성에게 투영해서 무차별 살인을 범하는 일만큼이나, 잔인하고 부조리하다.
탁월한 정치철학자이며 페미니스트이고 퀴어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의 저작에서, 지난 삼십여년간 자신의 관심이 성적 소수자에서 더욱 일반적인 소수자들,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박탈당하여 위태롭게 생존하고 있는 인민 모두에게로 넓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이를 가로지르며 공통성을 생성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창출하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윤리적·정치적 명령임을 역설한다. 이는 강파른 차별 질서에 얽매인 채 폭력과 혐오가 나날이 증폭되고 있는 비참한 현재에, 우리가 꿈꿀 수 있고 지향해야 하는 젠더 정치의 가치이기도 하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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