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유묵
[더불어 행복한 세상] 창간 28돌 기획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견리사의 견위수명” 담은
장일순 선생의 묵죽화
임재경 초대편집인
창간 28돌 맞아 한겨레에 기증
“해직 언론인들 아직도 거리에
후배들에 ‘무위당 결기’ 일깨우고파”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견리사의 견위수명” 담은
장일순 선생의 묵죽화
임재경 초대편집인
창간 28돌 맞아 한겨레에 기증
“해직 언론인들 아직도 거리에
후배들에 ‘무위당 결기’ 일깨우고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 한국 지성사의 큰 스승이자 서화의 대가인 무위당 장일순(1928~94) 선생이 <한겨레> 창간을 주도한 해직 언론인들에게 당부한 말씀이다.
‘한겨레’ 초대 편집인이자 부사장을 지낸 임재경(81) 선생이 15일 창간 28돌 기념으로 소장해온 무위당의 서화 작품 한 점을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다.
“1989년 봄 서울 양평동 사옥 시절 무위당 선생께서 개인적인 선물로 보내온 서화였어요.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유묵으로 남긴 글을 인용해 쓰고 대나무 그림에 내게 보내는 말씀까지 적어놓아서 예사롭지 않은 결기가 느껴졌지요.”
실제로 ‘임재경 인형 전’으로 시작하는 말씀에는 “금년 3월26일이면 안 의사께서 처형되신 지 만 80년이 되네요. 제국주의의 침략에 단호히 신명을 바쳐 가신 그분의 한 구절 견리사의 참으로 모골이 송연케 합니다. 전세계가 이(리)만 보고 의를 망각한 지 오래인 금일 의사께서 남기고 가신 견리사의 견위수명을 염하며 목죽일지를 쳤습니다-일속자”라고 적혀 있다. 일속자는 ‘좁쌀 한알에도 생명이 담겼다’는 뜻으로 그즈음 무위당이 쓰던 당호의 하나다.
“앞서 87년 겨울 한겨레신문 창간 준비를 하면서 강원 원주로 무위당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해주신 ‘충고’가 있어요. ‘좋은 일을 할수록 성급한 마음을 억제해야 된다’, ‘지금 재야 언론인들이 한겨레에 모두 모여 있는데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많이 낀다. 모두 한꺼번에 당할 수 있으니 후위도 대비해야 한다’는 염려였지요.”
이 서화를 받은 직후인 89년 4월14일 이른바 ‘방북취재 사건’이 터져 리영희 선생이 구속당하고 임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들도 안기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뒤로 서경원 의원 밀입국 사건으로 편집국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노태우 정권의 언론탄압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무위당의 혜안을 새삼 깨달았어요. ‘목숨 바칠 각오로 지켜야 한다’는 예언이었던 겁니다.”
임 선생은 <한국일보> 논설위원 시절인 1973년부터, 선배 언론인 리영희 선생과 함께 원주를 오가며 무위당이 작고할 때까지 20년 넘게 교분을 맺었다. 93년 논설고문을 끝으로 ‘한겨레’를 떠났지만 여전히 언론운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는 “또다시 해직 언론인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 엄혹한 시절을 맞아 자칫 ‘밥줄 지키기’에 안주하기 쉬운 후배들에게 ‘무위당의 결기’를 일깨워주고 싶다”고 기증의 취지를 밝혔다.
무위당기념관의 심상덕 관장은 “600여점을 헤아리는 무위당의 서화 가운데 대나무는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듯, 올곧은 펜으로 세상을 지켜달라는 큰 뜻과 무거운 짐을 당부하신 걸 보면 그만큼 ‘한겨레’에 대한 기대가 크셨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원주 출신인 무위당 장일순은 일찍이 한학을 익힌 뒤 1948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낙향해 농민·노동자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하며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무위의 삶을 살았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임재경(왼쪽) <한겨레> 초대 편집인 겸 부사장이 지난 9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그동안 액자를 보관해온 김명성(오른쪽) 대표와 함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서화 액자를 보며 ‘견리사의 견위수명’ 유묵과 대나무 그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