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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언론권력·밤의 대통령…영욕의 신문인

등록 2016-05-08 19:08수정 2016-05-08 22:01

2000년 3월3일 열린 <조선일보> 창간 80돌 리셉션에서 방우영(오른쪽 둘째) 고문이 김영삼(맨 오른쪽) 전 대통령, 김종필(맨 왼쪽)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 박태준(왼쪽 둘째) 당시 총리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00년 3월3일 열린 <조선일보> 창간 80돌 리셉션에서 방우영(오른쪽 둘째) 고문이 김영삼(맨 오른쪽) 전 대통령, 김종필(맨 왼쪽)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 박태준(왼쪽 둘째) 당시 총리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별세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신문사집 아이’로…‘최대 신문’ 확장
75년 34명 해고…‘조선투위’ 미제로
국보위 참여, 5.18 왜곡보도 등 오점
8일 세상을 떠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은 ‘살아 있는 언론권력’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언론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한 신문 경영인으로, 한국 보수언론을 확장시킨 주역이다.

고인은 일제 때 조선일보사 9대 사장을 지낸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손자로, 선친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가면서 형 방일영과 함께 양손자가 됐다. 금광사업으로 큰돈을 번 방응모가 1932년 조선일보사를 인수하면서 어릴 적부터 ‘신문사 집 아이’로 불리며 자랐다. 52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8년 동안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일한 뒤 본격적으로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62년 상무, 63년 발행인, 64년 전무 대표이사 등을 거쳐 40대 초반인 70년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형 방일영(전 조선일보 회장·2003년 작고)으로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고인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뒤 타사에서 유능한 편집기자들을 스카우트해 신문 편집을 변화시키고, 젊은 기자들에게 “제호 빼고 다 바꿔보라”고 주문하는 등 파격과 혁신을 요구하며 사세 확장을 이끌었다. 62년 10만부가 채 안 됐던 조선일보의 판매 부수는 79년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업계 선두로 자리잡았다. 한국언론사 전공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고인은 한국 신문의 현대적 경영을 일궈낸 거목으로서, 개발독재 체제에 기대어 ‘산업화’를 이룬 한 시대를 이끌고 대표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신문산업의 외형적 성장을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 뒤엔 언론 자유와 진실 보도를 요구한 기자들을 무더기로 내쫓는 등 부정적인 발자취에 대한 비판도 따라붙는다. 74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투쟁으로 유신정권의 탄압에 의한 ‘백지광고 사태’가 터지는 와중에 조선일보에서도 유신 찬양 기고문에 항의하는 백기범·신홍범 기자를 해고했다. 이에 75년 3월6일 기자들이 두 동료의 복직 약속을 지키라며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가자, 사장이던 고인과 경영진은 32명을 또다시 해고했다. 그 뒤 지금껏 조선일보사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고인은 이에 대해 2008년 팔순 기념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마음의 멍에로 남아 있다”면서도 “당시 일은 거론하지 마라. 차라리 나 죽고 나서 내 무덤에 와서 나를 욕하고 침을 뱉어라”고 밝히기도 했다. 40년 넘게 해법을 찾지 못한 해직 사태는 그의 별세로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됐다.

80년 5·17 쿠데타 뒤 전두환 신군부의 통치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언론계를 대표하는 위원으로 참여한 고인의 이력도 ‘오점’으로 남았다. 그는 “나의 명예보다 신문사의 안위가 먼저”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주의 신군부 지원은 신문 논조에도 영향을 미쳐 5·18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들을 ‘난동자’로 보도하고, 전두환을 ‘새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두둔했다. 또 그의 국보위 참여로 조선일보는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 통폐합을 비켜감으로써 최대 발행 부수 신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명예교수는 “고인과 조선일보는 산업화에 매몰된 나머지 개발독재 시대가 낳은 모순들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민주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립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고인은 반공주의, 안보상업주의를 내세워 우리나라 보수 담론을 협소화시키고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정치권력·경제권력과 손을 잡는 등 ‘언론권력’을 누렸다는 부정적 평가도 나온다. 이 때문에 조선일보의 정치 성향에 불만을 품은 청년 2명이 2006년 9월 귀가하던 고인의 승용차를 벽돌로 공격한 사건도 있었다.

올해 초 출간된 미수 기념 문집 <신문인 방우영>에는 88년 <한겨레> 창간에 얽힌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의 증언도 실려 있다. “사회부장 재직 때 창간되는 한겨레신문으로 가기로 결심한 기자들을 소집해 저녁을 함께 하면서 설득 끝에 격려의 말을 덧붙인 적이 있었다. 사장실에 불려가니 사장님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겨레 가는 기자들에게 저녁 대접하고 전별금까지 주었다면서…’라는 말과 함께 사장님의 씁쓸하고 착잡한 표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너무 스스로 멋을 낸 것 같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고 그는 밝혔다.

최원형 기자, 문현숙 선임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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