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3월 내내 우리는 새로운 기록들을 만들고 접하느라 숨 가빴다. 우선 야당 국회의원 38명이 참여하여 2월23일부터 3월2일까지 9일간, 192시간26분 동안 테러방지법안을 반대·저지하기 위해 진행한 필리버스터는 세계 최장기록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야권 정치인과 시민 사이에 정치 공감대가 형성되는 등의 유의미한 성과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필리버스터 중단 이후 국회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이다. 이제 우리가 ‘투명인간’이 되지 않는 한, ‘빅브러더 국정원’이 마음만 먹으면 시민의 개인정보를 합법적으로 모조리 볼 수 있게 되었다(<한겨레21> 1103호). 심지어 정부는 사이버테러방지법까지 추진할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이쯤 되면 현 정권의 야만적인 강경주의가 유신체제의 긴급조치에 빗대어지며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유전자’가 거론되는 현상이 당연하게 느껴진다(<한겨레> 3월15일치 30면).
두 번째 장면.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국’이 서울에서 열렸다. 알파고가 상징하는 인공지능의 우아함과 강력함에 대한 매혹이, 이세돌이 대표하는 분투하는 인간에 대한 감동과 절망에 겹쳐졌다. 정부는 곧바로 구글을 능가할 만한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세우겠다는 선언과 함께 ‘지능정보산업’ 발전 방안을 발표했다. 한편 보통의 사람들은 알파고를 계기로 해서 또 하나의 통제탑 건설로 연합해 들어가는 정부와 대기업의 재빠른 반응 및 스마트 신발과 인공지능을 분간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무지에 새삼 놀라며 키득댔다. 그 와중에, ‘아주 보통의 위기’의 신기록이 또 한 차례 닥쳤다(<한겨레21> 1103호). 다름 아니라 이삼십대 가구의 소득증가율이 사상 처음 감소했으며 청년실업률이 12.5%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현재 방식으로 통계조사를 한 1999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인공지능과 권력 불평등
테러방지법, 알파고, 청년실업- 이 세 가지 사건은 이 땅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진실을 알려주는가?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인공지능(AI), 로봇과 사람의 협업시대’ 보고서는,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에 따른 직무 대체 덕분에 2020년께가 되면 단순 반복 업무는 로봇이 맡고 인간은 ‘감성과 소통능력’을 활용하는 창의적인 일에 전념하게 되리라 전망한다. 여전히 유효할 인간의 직업으로 예술가와 전문가 등이 선정된 반면 인간을 떠날 직업에는 콘크리트공, 택배원, 행정사무원 등 단순 육체·사무 노동자가 포함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후자의 소멸 우선순위 직군은 최저임금 몇백 원을 올리기 위해 치열한 쟁투가 벌어지며, 다수의 학생 및 비정규직 청년들이 알바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는 고달픈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기술평론가 마리아 패럴이 단언하듯이, 빅데이터든 사물인터넷이든 인공지능이든, 이 모든 사안의 본질은 ‘권력’이다. 뉴테크놀로지는 대자본과 친하다. 또한 미디어 학자 레프 마노비치의 말대로 소위 멋진 신세계는 정보 소유자, 정보 관리자, 정보 피착취의 계급들로 위계화된 비뚤어진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
2016년 3월에 등재된 신기록들은 이미 청년의 현실로 체화되고 있다. 개강을 하면 학생들이 각자 좋아서 하는 일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여느 때 같으면 학생들은 티브이(TV) 시청이나 산책하기, 심지어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방에 틀어박혀 음악 듣기일지라도, 타인과 더불어 지내고 사회와 관계를 맺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경험들로 자신을 소개해 왔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은 홀로 살고 있으며, ‘앱’을 설치해서 건강을 관리하고, 먹방을 보며 음식을 해 먹고, 유튜브를 통해 명상의 소리를 듣는 식으로 ‘상처’를 달래고 ‘힐링’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먹먹해졌다.
청년의 삶,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르는 역사의 문제로
어쩌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미 사이버 내지 인공지능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위선적인 정치가나 탐욕스러운 사회질서 대신 스마트 기계들에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신뢰한다. 새로운 밀레니엄 즈음에 십대가 된 와이(Y)세대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빈곤한 후속 세대가 되리라는 암울한 세계 전망이 나와 있다. 영미권에서는 해리 포터를 읽으며 마술 같은 세상을 꿈꾸었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이제는 한 소녀가 억압적인 독재정권과 악독한 자본에 저항하는 내용의 영화 <헝거게임>에 열광한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사토리세대는 물론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의 하나로 알려진 스웨덴에서조차 부모가 앞서 길을 닦아주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생활을 유지하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그런 모양새를 갖춘 동계 스포츠 종목 명칭을 따라 ‘컬링세대’라고 부른다. 이런 지구적 양상들을 참고하면서 우리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얄팍한 자위라도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유로운 삶의 미학과 탈주를 주장하는 사유를 제안하며, ‘혼자임’에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보도록 학생들을 북돋고자 애썼다. 그러나 지치고 외로운 청년들은 스스로 대단한 위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그저 ‘사람대접’을 받고 싶을 따름이라고,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가 내뱉은 말을 똑같이 중얼거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감시효과든 노동 생산성이든,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스마트-인공지능이 만능이라고 찬미되는 반면, 막상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역설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각 현상을 칸막이 친 개별 기사들로 분리해서 처리하며 하나의 일시적인 소재를 다루자마자 방금 터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느라 분주하다. 그 결과 사회적 현실은 파편화하고 정치적 복잡성은 망각되는 분열적인 건망증이 고질화된다.
정치적 유전자로 기억되는 슬픈 과거부터 인공지능으로 상상되는 밝은 미래까지, 이 모순된 줄기들은 모두 우리의 현재를 이루는 사회적 실재다. 실제 대중의 경험세계에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상호 연관된 현실로 이해되고 있다. 어떤 독자는 알파고의 열풍 때문에 총선의 중요성이 축소되는 경향을 지적했으며, <한겨레> 페이스북 사이트에서는 청년의 입장에서 알파고를 패러디해서 한국 사회의 정계, 경제계, 학계를 풍자한 대학원생의 단편소설이 잔잔한 공감을 얻었다. 나는 독자들의 순진한 느낌이 각개 현상을 분리해서 피상적으로 다루는 언론 보도 내용보다 때로는 더 정확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성숙한 언론은 과거로부터 빚어진 오래된 사안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캐묻는다. 젊은 언론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현상에 호기심을 발휘하고 혁신을 꿈꾼다. 반면 급진성(래디컬)은 말뜻 그대로 뿌리를 파내어 움켜쥐고 내달리는 힘이다. 그래서 과거의 빚과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걸머지고 그것들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구속하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앞날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급진 언론이다. 따라서 <한겨레>가 진정한 의미의 급진적인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사안을 파편적이고 표면적으로 다루는 편의적 조합의 관행을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역사를 가로질러 존재하는 사건들 사이의 구조적 연결성과 의미의 복합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통찰하는 거시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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