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반대에서 불구하고 한일회담에 서명하는 박정희.
사쪽 “박정희 시대 친일 등 민감한 내용 언급 부적절”
3개월 넘게 방송이 지연되고 있는 <한국방송>(KBS) 탐사보도팀의 <훈장> 2부작이 제작진과 데스크 간의 2차 공방전을 벌이며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에 휩싸였다.
<훈장>은 한국방송 1텔레비전의 시사보도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 <간접과 훈장>, <친일과 훈장> 등 2부작으로 지난 6월과 7월에 내보내려고 한 작품이다. 탐사보도팀이 행정자치부를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는 정보공개청구 소송에서 3년 만에 승소해 훈·포장 명단 70여만건을 올 4월 입수해 빅데이터 활용으로 주목받았던 프로그램이다. 훈장 제작진은 프로그램이 뚜렷한 이유 없이 방송을 타지 못하자 지난 9월에 조속한 방송을 촉구하는 1차 성명을 냈으나 사쪽은 되레 제작진을 다른 부서로 인사조처하고 노조가 제안한 공정방송위원회 개최도 거부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훈장’ 제작진은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대한민국 훈장을 바라보는 두개의 시선’으로, 훈장 70년의 역사를 담담하게 그렸다고 강조한다. 한 제작진은 “친일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논쟁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보수·진보 양쪽의 대표적 역사학자의 시각을 다양하게 담아 균형있게 접근했다. 하지만 사쪽은 박정희 시대의 친일 관련한 민감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삭제 요구가 이어졌다.
제작진이 지난달 26일과 29일 낸 성명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 수교협상과 관련해 기시 전 일본 총리에게 보낸 친서 가운데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는 인사말을 놓고 사쪽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수교협상에 양쪽이 한창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한국의 최고 권력자’와 ‘일본의 막후 실력자’ 사이의 대등한 위치보다는 ‘사병과 장교’, ‘제자와 스승’ 관계 정도로 느껴지는 당시 분위기를 대변하기에 인사말을 넣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시사제작국 간부인 김형덕 탐사제작부장은 26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외교상 의례적 표현을 문제가 많은 것처럼 서술한, ‘편향적 해석이나 편협한 평가’이기에 (삭제 요구는) 데스킹 과정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제작진은 결국 이 요구를 받아들여 삭제했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제작진은 “일본인 훈장 관련 내용 전체를 다 삭제할 것”을 요구받았다며 결국 ‘불방’이 명확해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 부장은 계획된 불방 수순이 아니라며 29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훈장 방송을 위해서도 제작진에게 조속히 제작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방송계 안팎에서는 훈장의 표류에 대해, 한국방송 차기 사장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여야 모두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는 민감한 내용의 방송을 피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작진과 데스크 간의 갈등이 불거질 때 노사 동수로 참여하는 공정방송위원회를 열어 조정하도록 규정한 편성규약이 더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차기 사장 후보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명제청된 고대영 전 보도본부장이 이사회의 사장 후보 면접심사 때 현행 한국방송 편성규약이 노조 개입 여지가 크다며 개정을 시사한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은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문현숙 기자 hyuns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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