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한 대형서점 건물 전면에 한동안 걸려 있던 현수막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와 같은 어법을 정치와 언론의 관계에 적용하면, ‘정치는 언론을 만들고(기삿거리를 제공하고), 언론은 정치를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보도가 팩트(사실)를 골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정치와 언론의 관계도 책과 사람의 경우처럼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치와 언론의 관계는 사실보다는, 양쪽의 건강하지 않은 숨겨진 의도와 추측에 이끌려 보도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재보선 참패의 후유증으로 심한 내분을 겪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관련 보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우선 지난 8일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실린, ‘손학규, 강진 찾아온 비노 이종걸 원내대표 만나…천정배, 안철수도 회동 추진설’이라는 제목의 뉴스를 보자.
제목만 보면 이 원내대표가 당선 직후 강진까지 가서 손학규 전 상임고문을 만난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보면 이종걸 의원이 손 전 고문을 만난 것은 원내대표 경선 직전이었고, 그것은 경선을 앞둔 그의 선거운동의 일환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런 저런 추측과 ‘설’들을 덧붙여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흡사 손 전 고문이 정치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 첫발을 디딘 회동인 것처럼 과대포장을 했다. 다음날 조선일보 지면에 나온 “손학규 정계 복귀 가능성 높다”는 제목의 뉴스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제목을 뒷받침하는 팩트는 “손 전 고문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정계에 복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 그런 의사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는 이 원내대표의 말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정도의 말을 논거로 복귀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언론이 이런 식의, 추측 기사를 남발하는 것은 나름의 프레임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문재인 대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반대세력이 결집되고 있으며, 손 전 고문의 정계 복귀도 그 일환으로 추진된다는 것이 프레임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정치의 흐름을 왜곡하는 악성 뉴스는 아니다. 이 기사가 손 전 고문을 독자들의 뇌리에 되살려내는 효과를 가져, 실제로 그를 정치무대로 다시 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이 뉴스는 단순한 추측기사가 아니라 예리한 예측력을 갖춘 분석기사로 둔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새정치연합 상황을 다루면서도 독성이 강한 뉴스가 있다.
지난 8일 새정치연합 최고회의는 내분의 격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유승희 최고위원이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른 것은 어이없는 해프닝일 뿐이었다. 언론이 이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면, 독자들은 야당의 상황을 우려하고 비판하겠지만, 야당이 비아냥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사태를 전한 9일치 조선일보는 ‘싸우고 뛰쳐나가고 노래하고…이런 야당’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달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날 뉴스가 나이 든 사람들의 모임에서 야당을 욕하고 비아냥거리로 삼는 화제로 빠짐없이 등장한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독성이 강한, 팩트와는 동떨어진 정치기사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바로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가져오는 주범이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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