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가을 편성 개편을 앞두고 지상파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들을 선보이고 있다. 시범적으로 제작·방송해 반응이 좋으면 정규 편성하는, 5일치 <한겨레> ‘꽃할배 넘어라’ 기사의 표현대로 ‘맛보기’ 프로그램들이다. 이번에 선보이고 있는 것들에 기존 포맷을 베끼느니, 너무 위험하다느니 하는 우려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반응 자체가 이 프로그램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앵커가 나와 한마디 던지고는 이미 녹화해 놓은 기자 리포트 테이프를 돌리면서 1시간씩이나 끌어가는 저녁 뉴스가 결코 변하지 않으려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한국에서 오락은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는 장르이다. 심지어 유신시대에는 정부가 코미디 프로그램이 저속하다며 전면 폐지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 여파로 <웃으면 복이 와요>나 <고전 유머극장>은 권선징악형 ‘계도 오락’을 방송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식한 시청자’를 가르쳐 책을 읽게 하고 신호등을 지키게 하는 이른바 공익적 오락이 칭찬을 받았다. 오락이 관심과 돈을 벌어오는 ‘효자’이지만 예능 제작자들이 사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논문을 통해 오락이 “방송사 내 제작이나 사회 내 소비의 차원에서 공히 약자와 친근하다”고 말한다. 오락 프로그램은 “막말하고, 시끄럽고, 유치하고, 백해무익하다”는 엘리트주의적 비판을 들으면서도 시청자들과 교감하며 꾸준히 발전해 왔다. 지상파 방송사의 제작 역량은 케이블방송 채널로 이전돼 그곳에서 활약하는 스타 피디가 큰 성과를 내기도 한다.
권위를 조롱할 때, 의례와 가식을 걷어낼 때, 잊고 싶은 것을 드러낼 때, 지적·육체적·물질적 약함과 욕망을 숨기지 않을 때, 그리고 이것들이 시청자의 처지와 공감할 때 오락은 힘을 갖는다. 그것은 척박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하는 카타르시스이기도 하고 나만 혼자가 아니라 나와 공감하는 혼자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공동체 의식이기도 하다. 뉴스가 힘있는 쪽에 기울어 있고, 교양은 자꾸 가르치려 하고, 드라마는 숨겨진 재벌 아들·딸의 귀환을 반복해 재생산하며 우리를 현실에서 밀어내고 있을 때 예능은 독특한 현실성으로 공익에 기여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예능의 정치성을 심의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도 그만큼 오락의 대중 공감성이 크기 때문이다.
방송사는 개편을 통해 선보이는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안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급히 없애고 다른 것을 편성하고 하는 조급증을 버리길 바란다. 시청자 반응과 교감하며 출연진의 캐릭터가 만들어져 가고 새로운 포맷이 완성돼 가는 것은 <문화방송>(MBC) <무한도전>과 <에스비에스>(SBS) <런닝맨>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포맷 개발을 위한 인내는 공영 또는 지상파 방송사가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이고 이것이 곧 공익이다. 시청자 참여형 예능도 확대해야 하겠다. <한국방송>(KBS) <우리 동네 예체능>이나 <안녕하세요>와 같은 것들은 말로만이 아닌 실제로 ‘시청자와 함께’ 하는 모범 프로그램이다. 끝으로, 파일럿 한번 만들지 않는 뉴스 프로그램은 예능에서 배워야 한다. 웃기라는 것이 아니라 약자와 공감하라는 것이다. ‘무더위 뉴스’를 한없이 틀어대며 시청률을 수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 소재가 될 정도로 고답적인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한국 방송의 현실을 답답해하는 내게도 예능이 위안을 준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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