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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면에 ‘회장 인사 거부’ 실린 날 밤, 무슨 일이?

등록 2013-05-02 20:32수정 2013-05-03 09:40

<한국일보> 노조와 기자들이 2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비상총회를 열어 사쪽의 인사 발령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노조 제공
<한국일보> 노조와 기자들이 2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비상총회를 열어 사쪽의 인사 발령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노조 제공
노조 비대위가 장재구 회장 고발
회사, 편집국장 등 전격 인사로 맞서
경질당한 간부들 중심 신문제작
성명실린 신문 서울 일부만 배달
새 국장·부장단 신문제작 시도
“지시 거부” 기자들과 언쟁
<한국일보> 편집국 간부들을 비롯한 기자들이 회사의 인사 발령을 거부하고, 노조가 신문 1면에 ‘불법 인사 거부’ 성명(사진)을 싣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10년 넘게 경영 위기를 겪어온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주인 장재구 회장과 정면 대결하면서 추가 고발에 나서겠다고 밝혀 파문이 이어질 전망이다.

■ “인사 거부”로 ‘이중 편집국’ 체제 한국일보 기자들 대다수가 포함된 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2일 비상총회를 열어 전날의 편집국장과 부장단 인사를 “보복 인사”로 규정하고 새 국장과 부장의 지시를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한국일보 사쪽은 1일 하종오 사회부장을 편집국장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뼈대로 한 간부 인사를 단행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갑자기 단행된 인사가 매각 협상이나 경영 상황에 대한 장 회장의 책임에 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인 간부들을 좌천시키고 사주에게 우호적인 인사들을 배치했다고 주장했다. 이영성 편집국장은 창간60주년기획단장으로 발령났고, 고재학 경제부장은 부산취재본부로 발령났다. 정상원 노조 비대위원장은 “장재구 회장의 경영권과 인사권을 인정할 수 없다. 인사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기존 체제로 신문을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150여명이 참여한 비상총회에서 노조는 인사안을 거부하고 “인사 피해자”들은 현직을 고수한다는 등의 행동 지침을 정했다.

노조 비대위는 전날 ‘회장의 불법 인사를 거부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2일치 신문 서울 지역 배달판에 실었다. 노조 비대위는 성명에서 이번 인사가 “불법적 방식으로 한국일보 지분을 취득한 뒤 한국일보의 자산을 빼돌리고 한국일보에 큰 손실을 끼친 혐의로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는 장 회장이 검찰 수사를 모면하기 위해 인적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또 사쪽이 편집국장 내정자를 임명 5일 전에 노조와 편집평의회에 통보해야 한다는 규정도 어겼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경영진에게는 게재 사실이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 기자는 “사쪽이 미리 알지 못하도록 (한밤중에 인쇄하는) 서울 시내판에만 넣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벽 2시에 이를 안 사쪽이 발송을 중단시키고 서울 시내판을 수도권판으로 교체해, 서울 일부 지역에는 성명이 실리지 않은 신문이 배달됐다. 또 인터넷 지면보기 서비스에서는 성명이 실린 부분이 백지상태로 처리됐다.

노조와 기자들의 인사 거부에 따라 한국일보 편집국은 이중 지휘 체제가 됐다. 경질 대상이 된 이영성 편집국장은 2일 평소처럼 편집회의를 주재했고, 바뀌게 된 다른 부장들도 기자들을 지휘해 지면을 제작했다. 이 국장은 신문에 성명을 실은 데 대해 “나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한국일보의 미래를 걱정하는 후배들 뜻을 따른 것”이라며 “모든 불이익을 감수할 의사가 있음을 비상총회에서 피력했다”고 말했다.

신임 편집국장과 부장단은 지면 제작에 나서려고 했으나 회의 참석을 제지당하고 후배 기자들이 지휘를 따르지 않아 마찰을 빚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 “부실 경영” 사주 책임 문제가 배경 한국일보의 한 중견 기자는 “이번 인사는 노조와 비대위가 장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자 수사를 앞두고 실시한 인사”라고 말했다. 노조는 지난달 29일, 서울 중학동 사옥 매각 과정에서 장 회장이 자신이 건설사에 빚진 200억원을 갚으려고 신사옥 일부의 우선매수권을 포기해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며 그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노조는 장 회장의 불법행위가 더 있다며 추가로 고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노조는 창업주인 장기영 전 회장의 둘째 아들인 장 회장의 배임행위로 경영권과 인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장 회장은 2002년부터 경영권 획득 과정에서 채권단과 약속한 700억원 증자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최근 식품업체 또는 건설업체와 협상을 벌여 매각 양해각서 체결 직전까지 갔으나, 장 회장은 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이 결렬됐다고 사내에 공지한 바 있다.

한국일보의 경영 위기는 구제금융 위기 때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일보는 부채가 5000억원대로 불었다. 부채는 2007년 워크아웃을 졸업하며 200억원대로 줄었다가 현재 700억원대로 다시 늘었다. 정상원 비대위원장은 “몇년 새 부채가 이렇게 다시 늘게 된 것은 사주가 증자를 위해 돈을 끌어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장 회장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사주가 경영권 유지 등 사익을 위해 매각 협상을 그르쳤다고 인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창업 2세들(장강재·장재국 전 회장, 장재구 회장)이 번갈아 경영하면서 신문의 위상이 추락하고 재정이 망가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사쪽은 “편집국 일부 전직 간부와 노조 집행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신문 제작을 위해 설득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현숙 선임기자 hyuns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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