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카파(1913~1954)
[한겨레 창간 20돌] 매그넘 한국을 찍다
매그넘을 만든 두 영웅
매그넘을 만든 두 영웅
‘전설적 종군사진가’ 카파
전설적인 종군사진가, 매그넘의 산파인 로버트 카파(1913~1954). “만약 당신의 사진이 좋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접근하지 않은 탓이다”라는 명언으로 사진 저널리스트의 정신을 강조하는 ‘카파이즘’을 낳았다.
카파의 본명은 엔드레 에르뇌 프리드만. 헝가리 태생인 그는 유대인이란 사실을 숨기고 사진을 좀더 대접받고 팔고자 로버트 카파란 미국 이름을 가명으로 차용했다. 그는 성공한 사진가가 되었고, 실제로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었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처음 세상에 각인시킨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병사의 죽음>. 스페인 인민전선파 병사가 참호를 뛰쳐나오다 날아오는 기관총탄에 맞아 양팔을 벌린 채 쓰러지는 순간을 잡았다. 이후 그는 20세기 벌어진 여러 전쟁터의 최일선을 누비며 인간이 일으킨 가장 추악한 폭력을 사진으로 찍는 데 몰두했다. 2차대전의 분수령인 44년 6월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동틀 무렵 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육지로 전진하는 병사를 찍은 사진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54년 다섯 번째로 취재하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숨진 것이다. 그의 나이 불과 41살이었다.
카파는 단순한 내 편과 네 편(피아) 구분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이처럼 휴머니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쟁 사진가로 변신한 데는 함께 전쟁터에 뛰어들어 사진가로 활동했던 연인 게르다 타로와의 사랑, 그리고 타로의 죽음에 따른 이별이 얽혀 있다. 전쟁을 취재하던 타로가 탱크에 깔려 숨진 뒤, 카파는 점점 더 전쟁의 최전선으로 향했다. 타로 이후 일레인 저스틴, 할리우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과 사랑에 빠졌지만 모두 행복하게 끝맺지는 못했다.
잡지사든 군부대든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작업이 가능했던 그에게 찍고 싶은 사진을 찍는 것은 최대의 꿈이었다. 그 바람이 47년 사진판매 에이전시인 매그넘을 낳았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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