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호언론상 대신 받은 조용준 진상규명위원장
송건호언론상 대신 받은 조용준 진상규명위원장 인터뷰
“통일을 지향하던 <민족일보> 조용수씨가 사법적으로 명예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6회 송건호 언론상에 선정된 고 조용수 사장의 친동생 조용준(73·사진)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장의 수상 소감이다. 그는 7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역사 속에 잊혀진 민족일보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 조금은 고무된 분위기였다. 심사위원회는 “조용수 사장은 민족의 통일·자주·발전과 언론자유를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독립지사 유족 후원사업도 했죠”
“군사정권 강탈 재산 되돌려져야” 당시 민족일보 기획실장이었던 조용준씨는 이날 조 사장과 신문사 안팎의 당시 사정을 꼼꼼히 풀어갔다. 민족일보는 ‘4·19 공간’에서 1961년 2월13일 창간된 네 쪽짜리 조간신문이다. 조 위원장은 “창간자금은 5천만환이고 직원은 모두 102명”으로 회고했다. 민족일보의 사시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 △사회의 부정과 부패 고발 △노동대중의 권익 옹호 △조국의 통일을 호소하는 신문이라고 밝혀 처음부터 독자노선과 통일언론으로서의 방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신문의 창간은 성공적이었다. 혁신세력이 주도한 통일운동과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영역이었던 한-미 관계에서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논조를 구축해 진보적 지식인과 학생층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 위원장은 “창간부수가 1만5천부였던 것이 한 달도 안 돼 4만부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특히 가판에서 불티나게 팔려 “당시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유력지를 앞질러 가판 1위를 했다”고 전했다. 민족일보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찬성했으며, 미국한테서 원조를 받는 내용을 담은 한-미 경제협정은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조 위원장은 이에 대해 “장면 정부가 민족일보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며 제1의 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이어졌다. 창간 18일 만인 3월2일 이미 편집까지 끝난 지면을 두고, 인쇄를 맡았던 서울신문사에서 제작을 거부해 신문발행이 일시 중지되었다. 배후에는 장면 정권이 있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일보는 인쇄처를 바꿔 2대 반민주 악법이라고 불린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반대하는 사설과 기사를 실었다. 조 사장은 반대집회에 직접 나가 연설도 했다. 민족일보는 독립지사들의 면면을 지면에 소개할 뿐 아니라 ‘혁명유족 구호운동’ 사업에도 앞장섰다. 조 사장의 지시로 시작했는데, 주로 조용준씨와 문화부 기자가 분담해서 독립지사들을 직접 챙겼다. “지프차에 쌀 한 가마, 연탄 100장, 청주 1병을 싣고 김창숙 장건상 등 독립지사 집을 방문하였지요.” 그러나 신문사 기자들에게서 볼멘소리도 터져나왔다. “취재 차량이 지프 두 대밖에 없는데다 신문 찍을 종잇값도 제때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면서 신문사가 무슨 독립지사 후원단체냐”는 원망이었다. 민족일보 사건은 지난해 11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결정 뒤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이다. 오는 21일 4차 공판이 예정되어 있다. 당시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혁명재판소의 사형 판결에, 이회창 후보가 판사로서 1심에 관여했다고 하여 두 차례 대선서 논란이 된 바 있다. 형님이 사법 살인을 당한 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그러면서도 왜곡된 역사를 되돌리고자 인생을 다 보낸 조 위원장은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지만 조용수씨의 사법적 명예회복과 군사정권이 불법으로 강탈해간 재산들은 되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조 위원장의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전무배(75) 통일연대 고문(당시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도 “지난해 민족일보 복간공동추진위를 구성해 정부에 원상회복을 촉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족일보의 살아 남은 언론인들은 해마다 연말이면 조 사장 기일을 맞아 함께 묘지 참배를 했다고 한다. 송건호 언론상으로 올해는 더욱 뜻깊은 추모식이 될 거라며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글 문현숙 기자 hyunsm@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누군가
‘통일 새 지평’ 100여일만에 폐간 아픔…31살에 형장 이슬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1930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다. 삼촌 조경규, 외삼촌 하만복씨 등이 국회의원을 지내 일찍부터 정치적 환경에 노출되었다. 그가 훗날 좌파, 용공 등으로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지만 그의 학창시절은 우익에 가까운 온건파로 좌익세력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5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일본 학원가도 좌우익 논쟁은 치열하였다. 민단계 기관지인 <민주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재일동포 북송 반대 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런 그가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론’을 읽으면서 사상의 전환을 맞이하고 한국의 통일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타도되자 “조국의 민주화가 보이니 뭔가 나서야 한다”며 한국행을 택했다. 1960년 7월 경북 청송에서 민의원 총선거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낙선 뒤 신문창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재일동포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1961년 1월에 민족일보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2월13일 창간된 민족일보는 92호를 마지막으로 5·16 쿠데타세력에 의해 5월27일 폐간되었다. 그해 말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최고회의 의장의 명에 따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권의 희생양으로 31살의 젊은이가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다음해인 62년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조용수에게 ‘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문현숙 기자
문현숙 기자 hyunsm@hani.co.kr
“군사정권 강탈 재산 되돌려져야” 당시 민족일보 기획실장이었던 조용준씨는 이날 조 사장과 신문사 안팎의 당시 사정을 꼼꼼히 풀어갔다. 민족일보는 ‘4·19 공간’에서 1961년 2월13일 창간된 네 쪽짜리 조간신문이다. 조 위원장은 “창간자금은 5천만환이고 직원은 모두 102명”으로 회고했다. 민족일보의 사시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 △사회의 부정과 부패 고발 △노동대중의 권익 옹호 △조국의 통일을 호소하는 신문이라고 밝혀 처음부터 독자노선과 통일언론으로서의 방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신문의 창간은 성공적이었다. 혁신세력이 주도한 통일운동과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영역이었던 한-미 관계에서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논조를 구축해 진보적 지식인과 학생층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 위원장은 “창간부수가 1만5천부였던 것이 한 달도 안 돼 4만부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특히 가판에서 불티나게 팔려 “당시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유력지를 앞질러 가판 1위를 했다”고 전했다. 민족일보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찬성했으며, 미국한테서 원조를 받는 내용을 담은 한-미 경제협정은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조 위원장은 이에 대해 “장면 정부가 민족일보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며 제1의 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이어졌다. 창간 18일 만인 3월2일 이미 편집까지 끝난 지면을 두고, 인쇄를 맡았던 서울신문사에서 제작을 거부해 신문발행이 일시 중지되었다. 배후에는 장면 정권이 있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일보는 인쇄처를 바꿔 2대 반민주 악법이라고 불린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반대하는 사설과 기사를 실었다. 조 사장은 반대집회에 직접 나가 연설도 했다. 민족일보는 독립지사들의 면면을 지면에 소개할 뿐 아니라 ‘혁명유족 구호운동’ 사업에도 앞장섰다. 조 사장의 지시로 시작했는데, 주로 조용준씨와 문화부 기자가 분담해서 독립지사들을 직접 챙겼다. “지프차에 쌀 한 가마, 연탄 100장, 청주 1병을 싣고 김창숙 장건상 등 독립지사 집을 방문하였지요.” 그러나 신문사 기자들에게서 볼멘소리도 터져나왔다. “취재 차량이 지프 두 대밖에 없는데다 신문 찍을 종잇값도 제때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면서 신문사가 무슨 독립지사 후원단체냐”는 원망이었다. 민족일보 사건은 지난해 11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결정 뒤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이다. 오는 21일 4차 공판이 예정되어 있다. 당시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혁명재판소의 사형 판결에, 이회창 후보가 판사로서 1심에 관여했다고 하여 두 차례 대선서 논란이 된 바 있다. 형님이 사법 살인을 당한 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그러면서도 왜곡된 역사를 되돌리고자 인생을 다 보낸 조 위원장은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지만 조용수씨의 사법적 명예회복과 군사정권이 불법으로 강탈해간 재산들은 되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조 위원장의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전무배(75) 통일연대 고문(당시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도 “지난해 민족일보 복간공동추진위를 구성해 정부에 원상회복을 촉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족일보의 살아 남은 언론인들은 해마다 연말이면 조 사장 기일을 맞아 함께 묘지 참배를 했다고 한다. 송건호 언론상으로 올해는 더욱 뜻깊은 추모식이 될 거라며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글 문현숙 기자 hyunsm@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누군가
‘통일 새 지평’ 100여일만에 폐간 아픔…31살에 형장 이슬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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