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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과몰입’ 류희림 방심위, 16년간 곪아온 추천 제도가 키웠다

등록 2024-01-21 17:16

관행처럼 여6·야3 심의위원 추천
진영 대결 치열해지자 ‘정치적 과몰입’ 심화
“제도 부패”, “추천권자 선의에 기대” 지적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연합뉴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정치 심의’ ‘언론 검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들이대는 심의 규모와 제재 강도는 전임 위원회를 뛰어넘었고, 심의위원 구성 역시 이례적으로 기울었다. 전문가들은 류희림 방심위원장과 윤석열 정부의 언론관에 일차적인 책임을 물으면서도 근본 원인은 십수년간 방치된 방심위 제도의 실패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공정성 심의 축소, 위원 추천제도 개선, 자율규제 도입 등 해묵은 개혁 과제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짚었다.

21일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을 보면, 방심위 심의 기준 61개 조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공정성(9조)이다. 이 규정은 세부 항목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지 않을 것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할 것 △사안을 한쪽에 유리하게 편집하지 않을 것 등 ‘공정할 의무’를 방송에 부여하고 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호한 개념 정의에 그치고 있어 자의적인 심의 수단으로 오남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부작용은 류희림 방심위 체제에서 두드러졌다. 방심위 누리집에 공개된 방송심의 의결 현황 자료를 보면, 방심위는 류 위원장이 부임한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석달 동안 지상파 티브이·라디오, 종편, 보도전문채널의 시사·보도 프로그램 32건에 대해 공정성 조항 준수 여부를 주요하게 심의했다. 전임 정연주 위원장 시절에는 2023년 1~8월 9건, 2022년 한해 동안 4건에만 공정성 조항을 적용해 심의했다. 부임 3개월 만에 전임자의 3.5배, 8배에 이르는 ‘공정성 심의’를 행한 셈이다.

방송심의 규정 9조 ‘공정성’을 적용한 의결 비교 그래프.

전문가들은 행정적 제재 권한을 가진 방심위가 공정성 같은 주관적인 개념으로 언론을 재단하는 일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김경환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당사자들이 각자 목소리를 내는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공정성을 기준으로 심의하는 일 자체가 효율적이지 않다”며 “정부, 정당, 시민단체 외에는 방송 심의에서 공정성을 논란으로 삼는 집단이 없다. 공정성은 정치적 목적에서 활용되는 조항”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책임연구자로 참여한 방심위 연구용역보고서 ‘해외 시사·보도프로그램에 대한 내용규제 현황 연구’(지난 10일 공개)를 보면 “공정성 심의는 가급적 축소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고, 이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판단된다”고 돼 있다. 이 보고서는 이미 1987년에 공정성 원칙을 폐기한 미국과 자율규제 중심의 유럽 등의 사례를 거론하며 “(한국은) 방송사에 개별 뉴스 단위부터 공정성 원칙을 요구하면서 언론의 자기 검열, 위축 효과가 나타나는 등 저널리즘 기능을 약화하고 있다”고 썼다.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과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지난해 10월10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아울러 방심위를 정치적 대리전의 장으로 전락시킨 핵심 요인으로 여야가 심의위원 추천권을 나눠 갖도록 한 구조도 꼽힌다. 현 방통위법(18조)은 방심위 심의위원 9명을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각각 3명씩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하도록 하고 있다. 국회는 그동안 이 추천권을 여야 6 대 3으로 나눠 관행처럼 운영해왔다. 이 구도에 극단화하는 진영 대결 풍토가 결합하면서 방송 심의에 대한 정치적 과몰입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연주 전 방심위원장이 지난해 3월 공개한 역대 방심위 정당 민원 접수 통계를 보면, 방심위가 출범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1건에 그쳤던 정당 민원은 2014년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36건을 시작으로 양당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늘어갔고 2022년에는 1687건까지 폭증했다. 특히 국민의힘은 2017~2022년 전체 정당 민원(4601건)의 약 80%(3673건)를 쏟아냈다. 심의위원 구성에 따라 방심위가 정치권의 ‘민원 청부 업자’ 노릇을 해온 셈이다.

4기 방심위(2018년 1월30일~2021년 1월29일) 심의위원을 지낸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교수는 “현재의 추천 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며 “어떤 정부든 방심위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해왔고,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제도 부패’가 드러난 것”이라고 짚었다. 김준희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방심위지부장도 “애초 정치권에서 선수를 뽑아서 방심위로 파견하는데, 정치 심의를 안 할 거라는 기대는 순진한 생각이다. 지금 시스템은 추천권자의 선의에 기대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야권 추천 심의위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방심위에서 열린 전체회의를 마치고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성옥, 옥시찬, 김유진 위원. 방심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야권 추천인 김유진·옥시찬 위원에 대한 해촉 건의안을 의결했다. 연합뉴스

‘류희림 방심위’는 16년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제도 개혁을 미뤄오면서 빚어진 참사라는 진단이 나온다. 심영섭 교수는 “2018년 4기 방심위 출범과 함께 △자율규제로 이행하기 위한 체제 개편 △공정성·객관성 등 심의 규정 개편 △악성 민원에 대한 사무처 견제 권한 강화 등을 논의했으나 정부, 여야, 진보·보수 모든 시민단체의 반대 속에서 무산됐다”며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둘 다 공약으로 자율규제를 내걸었으나 시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이번에도 우리가 제도 개혁 과제를 소화하지 못하면, 앞으로 제2의 류희림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언론에 대한 국가 개입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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