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앵커브리핑> 펴낸 손석희
2019년 12월31일 마지막 앵커브리핑 모습. 김현정 작가 제공
손석희 앵커는 지난해 <장면들>에 이어 최근 <…의 앵커브리핑>을 펴낸 데 대해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생각해온 저널리즘을 실제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석희 제공
그 기준이라면 시대 변해도 후회할 글 없을 것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과 ‘시선집중’을 오래 진행해온 손석희는 공정성, 중립성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진행자’ 이미지였다. 반면 앵커브리핑은 손석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 방향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의도했던 건가. “앵커의 생각이나 의견을 반영하는 데에는 익숙지도 않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처음엔 단순히 뉴스 아이템에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앵커가 직접 해본다는 의도 정도였다. 하지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해간 측면이 있다. 시작하고 나니 곧바로 에디토리얼의 성격을 띠더라. 다만 나만의 생각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시청자들이 공감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고, 그 접점을 끊임없이 찾아가려 했다. 문학과 철학·예술 등을 끌어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흔히 수사학에서 말하는 로고스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파토스가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 난 뉴스나 시사만이 저널리즘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뉴스나 토론뿐 아니라 교양이나 음악을 담당했던 내 방송 경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논리의 가치를 잃을 수는 없기 때문에 결론은 늘 문제를 제기했던 원점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앵커브리핑이 대부분 수미상관법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을 둘러싼 환경의 급변과 언론 정파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과거 했던 말이나 글이 종종 불려나오기 때문일까. 칼럼 쓰기 어려운 시대라고 흔히들 말한다. 후회하거나 아쉬운 글은 없었나. “언론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는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 두가지를 기반으로 써나갔다면 특별히 후회할 것은 없지 않을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두 가치가 변하진 않지 않나. 진영이 달라도 모두 그 두가지를 추구할 테니 시비 걸 사람도 없을 테고. 물론 설득력이 모자랐거나 억지가 들어갔다면 그건 글을 쓰는 수준의 문제니까 나도 더 공부해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니 마치 내가 좋은 에디토리얼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난 그냥 방송쟁이고 방송에 맞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언론의 진영논리 보도, 수익은 돼도 정론일순 없어
진영 넘어 꾸준히 보도, 합리적 시민사회 인정할 것 평소 그가 강조했던 뉴스의 기준, 즉 ‘팩트, 공정, 균형, 품위’는 지금 여전히 한국 언론이 구현해야 할 과제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그는 <장면들>에서 2016년 당시와 이른바 조국 정국 이후 달라진 <뉴스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서술하며 언론은 ‘담장 위를 걷는 존재들일지 모른다’고 썼다. ―토론과 인터뷰가 ‘선거저널리즘의 좋은 방법론’이라고 말해왔다. 실제 지난 19대 대선 때 대선 주자들과 ‘압박면접’식 인터뷰를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이번 선거에선 ‘삼프로 현상’이 화제가 되고 정책검증 기사는 5.5%에 불과했다는 분석도 있다. 어떻게 보나. “우선 선거보도를 그리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내가 무슨 압박면접 볼 위치는 아니었고, 그냥 궁금한 것을 물어봤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면, 우선 궁금해야 하고, 시간과 상황이라는 조건에 되도록 구애받지 않고 물어봐야 하는 거다. 그런데 방송이든 신문이든 워낙 제약조건이 많으니 늘 한계가 있다. 다만 제한된 시공간을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문제들에 대부분 할애한다면 반성해야 할 텐데, 언론들이 시청률이나 포털 조회수에 매달리다 보니 점점 그리되는 것 같다. 정책을 다루면 재미없다 생각하고. 내가 과거 인터뷰했던 알랭 드 보통이 한 말이기도 한데,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재미없는 걸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드느냐일 게다. 난 그 방법론을 인터뷰와 토론으로 택했던 것이다.” ―미국 언론학자를 인용해 ‘경비견’과 ‘감시견’ 모델을 이야기한 적 있다. 결국 이 또한 정파성의 문제겠지만, 적잖은 언론인들이 자신들은 ‘감시견’의 역할을 하는데 독자들이 ‘경비견’이나 심지어 ‘애완견’으로 오해한다고 말한다. “국정농단 국면에서의 보수언론의 보도에 대해 그렇게 해석하는 게 가능한데, 경비견 모델은 쉽게 말해 언론이 스스로 속해 있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그 체제 내의 집권세력과 불화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은 대부분 시장으로 대표되는 체제 속에 들어와 있고, 체제 밖의 언론은 거의 없다. 거기서 감시견의 역할을 지속하려면 일단 시장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감시견으로서의 수익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미 진영화돼 있는 측면이 강하고, 진영논리로 보도하면 기본적인 수익모델은 되는데 그것이 ‘정론’이라 할 수는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장면들>에선 이른바 합리적 시민사회에 기대를 건다고 말했는데, 많은 이들이 그들은 적극적인 미디어 수용층이 아니라서 당장의 수익모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난 생각이 다르다. 언론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변화로 이어지면 합리적 시민사회, 즉 지나친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은 시민사회는 인정해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점차 ‘우군’을 늘려나가면 된다.” 정치는 나와 맞지않는 운동장, 언론 상위도 아냐
언론인 정치직행 최소한 ‘우리끼리 룰’ 지켰으면 뉴스앵커에서 물러난 지 1년이 훨씬 지난 지난해 9월 <시사인(IN)>의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조사에서도 그는 2007년 조사 시작 이래 계속 1위를 유지했다. 방송인 유재석씨가 2위라는 점과 함께 현재의 언론계 상황을 상징하는 조사라는 말이 나왔다. ―과거 몇번 방송에서 정치권에 안 나간다고 밝힌 적 있다.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많은 제안이 있던 걸로 안다. “그런 제안은 그냥 날 이용하려는 것뿐인데, 내가 그걸 모르면 바보다. 난 정치가 언론보다 상위에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냥 다른 운동장인데 나하곤 애초 맞지도 않는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지만 언론인의 정계 직행에 대한 비판이 더 커지고 있다. 실제 이동하는 이들은 보직 고참들인데 비판은 현장의 젊은 후배들이 받고 언론사에 대한 불신을 더 강화한다는 지적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나. “난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해왔다. 요즘처럼 언론과 정치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언론을 하고 있는 건지 정치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해야 한다면, 그냥 최소한 우리끼리의 룰이라도 지켰으면 좋겠다. 어제까지 여기 일하다가 내일 갑자기 정치로 가는 건 도의의 문제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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