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임대아파트 살며 전재산 기부한 신경례 할머니
홀로 임대아파트 살며 전재산 기부한 신경례 할머니
빈농에서 태어나 “못 배운 게 한이 됐다”
남편·외아들 모두 병사…담배가 유일한 낙
아들 유산에 보조금 모은 2천만원 ‘기꺼이’ 서울 강서구 가양3동에 있는 신경례(82) 할머니의 영구 임대아파트에는 없는 게 많다. 흔한 세탁기나 비디오도 없다. 작은 냉장고엔 달랑 김치 한 통과 할머니가 즐겨 먹는 요구르트가 들어 있을 뿐이다. 이 집에선 남자 목소리도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1926년 경기 여주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바느질 배울래, 학교 갈래”라고 묻는 아버지에게 그냥 바느질이나 배우겠다고 했다. 학교 문턱은 밟아 본 적이 없다. 스물한살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아들 하나 두고 살 때까지만 해도 살만했다. 고된 농삿일쯤이야…. 불행은 할머니가 서른한살 되던 해 남편이 느닷없이 늑막염에 걸려 숨을 거두면서 시작됐다. 그리곤 아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까막눈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당에서 설겆이하는 것 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호구지책으로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나 조만간 실직한 아들을 할머니가 취로사업에 나서 먹여 살렸다. 그 사이 며느리와 아들은 이혼했다. 손자 하나 낳을 틈도 없었다. 1992년 지금 사는 임대아파트를 얻어 한숨을 놓았다. 7년 뒤 아들이 느닷없이 집앞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켜 숨지면서 할머니는 다시 한숨을 쉬어야 했다. 할머니는 10일 아들의 빛바랜 사진 앞에서 “활명수 한 병 안마실 정도로 튼튼한 아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땐 하루에 담배를 세갑씩 피웠다고 한다. 어느날 돌아보니 부모 형제도 모두 숨지고 할머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달 중대한 결심을 했다. 통장에 들어 있는 전재산 2천만원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아들이 통장에 남기고 간 1천만원에다 한 달에 58만원씩 나오는 정부 보조금을 할머니가 조금씩 아껴 모은 1천만원을 보탠 것이다. 할머니가 내놓은 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협의해 가양3동의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쓰이게 된다. 그는 기부의 동기를 묻자 “수다스럽게 뭐 그런 소리를 해”라며 입을 다물더니 곧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됐다”고 말했다. “어차피 못 쓰고 죽을 돈인데, 그냥 돈 없는 학생들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꼬리와 사골을 들면서도 “맛난 건 비싸서 못 사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 몇마리 값의 돈을 배움의 씨앗을 뿌리는 데 던졌다.
오래살까봐 되레 겁난다며 고개를 흔들던 할머니는 건강하시라는 말에는 그 동안 틀니가 헐거운 듯 계속 ‘쩝쩝’ 입맛을 다시던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었다. 신경례 할머니의 누추한 임대아파트에는 다른 집에선 찾기 어려운 게 두 가지 있다. 돈 욕심으로부터의 자유와 나눔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남편·외아들 모두 병사…담배가 유일한 낙
아들 유산에 보조금 모은 2천만원 ‘기꺼이’ 서울 강서구 가양3동에 있는 신경례(82) 할머니의 영구 임대아파트에는 없는 게 많다. 흔한 세탁기나 비디오도 없다. 작은 냉장고엔 달랑 김치 한 통과 할머니가 즐겨 먹는 요구르트가 들어 있을 뿐이다. 이 집에선 남자 목소리도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1926년 경기 여주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바느질 배울래, 학교 갈래”라고 묻는 아버지에게 그냥 바느질이나 배우겠다고 했다. 학교 문턱은 밟아 본 적이 없다. 스물한살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아들 하나 두고 살 때까지만 해도 살만했다. 고된 농삿일쯤이야…. 불행은 할머니가 서른한살 되던 해 남편이 느닷없이 늑막염에 걸려 숨을 거두면서 시작됐다. 그리곤 아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까막눈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당에서 설겆이하는 것 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호구지책으로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나 조만간 실직한 아들을 할머니가 취로사업에 나서 먹여 살렸다. 그 사이 며느리와 아들은 이혼했다. 손자 하나 낳을 틈도 없었다. 1992년 지금 사는 임대아파트를 얻어 한숨을 놓았다. 7년 뒤 아들이 느닷없이 집앞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켜 숨지면서 할머니는 다시 한숨을 쉬어야 했다. 할머니는 10일 아들의 빛바랜 사진 앞에서 “활명수 한 병 안마실 정도로 튼튼한 아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땐 하루에 담배를 세갑씩 피웠다고 한다. 어느날 돌아보니 부모 형제도 모두 숨지고 할머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달 중대한 결심을 했다. 통장에 들어 있는 전재산 2천만원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아들이 통장에 남기고 간 1천만원에다 한 달에 58만원씩 나오는 정부 보조금을 할머니가 조금씩 아껴 모은 1천만원을 보탠 것이다. 할머니가 내놓은 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협의해 가양3동의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쓰이게 된다. 그는 기부의 동기를 묻자 “수다스럽게 뭐 그런 소리를 해”라며 입을 다물더니 곧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됐다”고 말했다. “어차피 못 쓰고 죽을 돈인데, 그냥 돈 없는 학생들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꼬리와 사골을 들면서도 “맛난 건 비싸서 못 사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 몇마리 값의 돈을 배움의 씨앗을 뿌리는 데 던졌다.
오래살까봐 되레 겁난다며 고개를 흔들던 할머니는 건강하시라는 말에는 그 동안 틀니가 헐거운 듯 계속 ‘쩝쩝’ 입맛을 다시던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었다. 신경례 할머니의 누추한 임대아파트에는 다른 집에선 찾기 어려운 게 두 가지 있다. 돈 욕심으로부터의 자유와 나눔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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