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쾌한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들이 종합세미나 ‘케포이필리아’에서 ‘잔치 같은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배움이란 유희다 자유다 행복이다 아무리 진지한 공부도 이곳에선 웃음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놓는다. 웃음의 지뢰밭을 이 사람들은 조심성없이 성큼성큼 걷는다. 터지면 다치는 게 아니라 유쾌해진다. 배움은 유희이고 잔치이고 충전이고 활력이다. 유쾌한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 목요일 저녁 1층 식당이 순식간에 종합세미나실로 변한다. 식탁이 책상으로 바뀌고 방금 밥을 먹은 사람들은 얌전한 학생이 돼 의자에 앉는다. 발표자가 발제를 하고 이제 막 토론이 시작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농담 한 마디를 던진다. 식당, 아니 세미나실을 꽉 메운 사람들 입에서 폭소가 터진다. 이곳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웃음이 살짝 뒤로 빠지면 진지한 목소리가 앞으로 나온다. 톤이 높아지고 얼굴이 발갛게 단다. 열기가 자못 뜨겁다 싶으면 누가 얼른 말의 파도를 가른다. “싸우지들 마세요!” 다시 웃음이 터지고, 또다시 열기가 오르고, 저녁 7시에 시작된 세미나는 밤 10가 돼서야 겨우 끝이 난다. 서울 종로구 원남동, 종묘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어선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펼쳐지는 일상적 풍경의 한 장면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종합세미나를 ‘케포이필리아’라고 부른다. 라틴어를 조합해 만든 말인데, ‘우정의 정원’이라는 뜻이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만든 공부모임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절제의 쾌락’을 가르친 이 진지한 철학자의 정원에는 노예들, 매춘부들, 가난뱅이들이 무시로 들락거렸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차별도, 노소의 차별도, 학벌의 차별도 없다. 학구열만 있으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누구나 서로에게 스승이고 제자이고 친구다. ‘에피쿠로스의 정원’ 서 묘안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유쾌한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쯤 될까. 자본주의 도시문명 한가운데 떠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지혜와 지식에 굶주린 이곳 사람들에게 공부는 곧 행복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첫 구절이 여기선 그대로 생활이다. 행복조차도 이들에게는 배워서 익혀야 할 대상이다. 웃음조차도 학습해야 한다. “니체가 그런 말을 했죠.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한다’고요. 행복해지는 법, 유쾌하게 사는 법도 이곳에서 배웁니다.” 이곳 공동대표 고병권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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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자유로운 공간이다. 자유는 말하자면, 이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조건이다. 지시하는 사람도 없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다. 세 개 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엔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고, 연구실도 있고, 독서실도 있고, 요가실도 있다. 관리자만 없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지만 누구나 책임을 진다. 모두가 이곳의 주인이다. 바깥 세계의 상식은 이곳에선 때때로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습속으로 굳어진 예속일지도 모른다고 고병권씨는 말한다. ‘인간, 행복조차 배워야 한다’ 이곳은 자유의 공간인 만큼, 의무의 공간이고, 배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고받음’이다. ‘주고받음’을 통해 행복을 키운다. 무엇을 주고받는가.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곳은 ‘선물경제권’이다. 1층 칠판에는 이번 달에 누가 무엇을 주고갔는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적혀 있다. 계단 벽면에는 누가 얼마를 기증했는지 표를 만들어 붙여놓는다. 모든 게 선물이다. 2층 카페의 탁자도 선물받은 것이고, 벽을 가득 채운 시디는 이 공간의 창안자인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씨가, 음반은 정선태(동국대 교수)씨가 선물한 것이다. 만화책도 이 공간의 회원인 한영주씨가 선물했다. 3층 집필실의 운용법을 보면 이곳 사람들에게 선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집필실 사용에는 암묵적 규칙이 따릅니다. 신청한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학위논문을 쓰든 책을 쓰든 구체적인 성과물을 내겠다는 각오가 돼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죠. 책을 완성하지 않으면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명시적 강제사항이 아니라 암묵적 합의 같은 것입니다. 집필실을 제공했다는 것은 일종의 선물을 준 것인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책이든 논문이든 구체적인 성과물입니다. 그 성과물을 받아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 그게 선물인 셈인데, 만약 그런 묵계를 깨뜨린다면 사람들이 염치없다고 생각하겠죠.” 주고받음. 새로운 삶을 실험 이 공간의 사람들은 행복해지는 법,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고 또 ‘잘 주는 법’, ‘잘 받는 법’을 배운다.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운다. 학문만 익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활을 익히는 곳, 학문의 지혜가 생활 속에 체화되는 곳, 종묘 옆 조용한 골목길에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험하는 공간이 있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jlee@hani.co.kr
5년전 합치면서 생활공동체 실험
검증된 ‘일반회원’ 공간애정 각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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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일반회원’(정회원)과 ‘세미나회원’(준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회원은 60명쯤 되며, 세미나회원은 방학철에는 100여명, 학기철에는 50~60명 정도 된다. 세미나회원은 30여 개에 이르는 철학·문학·역사·선불교 등등의 각종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고, 또 이 공간의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일반회원과 차이가 없다. 이 공간에서 일반회원은 ‘특혜’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회비도 더 많이 내고(월 3만원~15만원), 공간을 가꾸는 데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일반회원이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공동체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예비회원 비슷한 자격을 얻어 이 공간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이 다른 일반회원들과 리듬이 맞는지 느낌이 통하는지를 장기간 검증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공간 속에 녹아들어 다른 사람과 자연스럽게 리듬을 맞추게 되면, 그래서 다른 모두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비로소 일반회원이 되는 것이다. 이 비규칙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 공간은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런 일반회원의 면면은 백화제방이라 할 정도로 다채롭다. 출판사 편집자, 중학교 교사, 대학원생, 대학교 시간강사 등등 직업도 다양하다. 현직 대학교수도 여러 명이다. 대학 교수는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이고 이곳이 진짜 직장이라는 우스개소리가 나올 정도로 일반회원들의 이곳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각별하다. 부부 회원도 적지 않아서 고병권-한영주씨, 권보드래-류준필씨 등 네댓쌍이 된다. ‘수유+너머’는 국문학자 고미숙씨의 1인 연구실 ‘수유연구실’과 사회학자 이진경씨 중심의 ‘연구공간 너머’가 결합하며 시작됐다. 두 모임은 2000년 하나의 이름으로 합치면서 단순한 연구공동체를 넘어선 생활공동체를 본격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에게 인문교양을 가르치는 ‘청소년아카데미’와 일종의 대학원 과정인 ‘강학원’, 동아시아 책들을 번역하는 ‘번역학교’ 등도 운영하고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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