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물의 색깔을 닮은 쪽빛에 빠져 20년 전부터 쪽물 염색을 연구해온 김광수씨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쪽염색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김씨가 쪽물과 감물을 들여 말리고 있는 옷감 사이에 서있다.
쪽물 들이는 ‘수행자’ 김광수씨
고담전통염색연구소는 김해시 진례면 고모리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수졸(守拙). 전망이 탁 트인 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어서자 문틀 위에 걸린 전각이 손님을 맞는다. 집 주인 김광수(60)씨의 작품이다. 글씨도 조각도 예사롭지 않다. 수졸은 바둑에서 초단을 일컫는 말. 아직 미숙한 데는 있지만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당호인데 집이라 부르기에는 누추해서…” 그냥 수졸이라고만 새겼다. 절에 걸린 현판 가운데 그가 새긴 게 적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다. 전각은 그에게 돈벌이가 아닌 수행이었다고 했다. 한때 우리 차에도 빠졌다.
이쯤 되면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곧바로 “쪽물 들이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며 20여년 전부터 쪽 연구를 시작해 10년 전 사업을 접고 아예 쪽 염색에 삶을 걸었다. 사연이 있었다. 불교처럼 그와 쪽은 숙생의 인연이 있는 듯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 주말이면 동네 절에 놀러갔다. 그곳에서 스님들로부터 불교 교리를 배우면서 쪽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스님들은 어린 그에게 불교의 색을 설명할 때 자주 쪽을 비유로 들었다. 어릴 때 기억은 자라면서 곧 잊혀졌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인 1993년 5월. 그는 전통사찰음식연구소 1기 수강생으로 서울을 오가며 사찰 음식을 배웠다. 그때 강사였던 한 노스님으로부터 쪽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까닭도 몰랐지만 쪽에 대한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그때부터 <규합총서> <산림경제> 등 옛 문헌을 뒤지고 우리 나라는 물론 일본, 중국, 베트남, 태국까지 쪽염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일본 도쿄의 한 박물관에서는 불화가 그려진, 1천년 가까이 된 쪽염 족자를 보기 위해 사흘 동안 찾아가 사정하기도 했다. 공부를 할수록 의문이 커졌다. 전라도에서 쓰는 이남 방식, 일본 스쿠모 방식 등 쪽염법은 그가 어릴 때 들은 것과 달랐다.
‘숙생의 연’ 끌린 듯 쪽염에 빠져
20년 연구 끝 염색법 스스로 깨쳐
‘시한부 폐암’ 이기고 10년째 무탈 “전라도의 쪽염 방법은 대궁까지 쪽을 잘라 항아리 속에 넣고 빗물에 재운 다음 석회를 섞어 만든 침전물인 인디고에 잿물을 부어 만든 염료로 염색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쪽잎을 따서 잰다는 말씀이셨습니다.” 10년 가까운 연구 끝에 석회를 쓰지 않고 바로 원액을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됐다. “뭔가 영적인 각성으로 알게 된 듯하다”는게 그의 말이다. 조상들이 붉은색의 쪽이 파란색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듯이. 이제 쪽염색을 해볼 차례. 95년 말께였다. 그때 몸에 탈이 났다. 어느날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폐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소세포암이었다. “의사가 이건 죽어도 살 수 없는 병이라 카데요.” 4개월 가량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아 “쪽염이나 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다음해 2월 퇴원한 뒤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매일 새벽 2시간 참선을 했을 뿐, 다른 치료도 않았지만 방사선 치료 후유증말고는 아픈 데 없이 지금껏 잘 살고 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몇 달이 그에게는 죽음을 화두삼아 살던 기간이었다. 죽음조차 받아들인 뒤 그는 편안해졌다. 하늘이 쪽염법을 깨달은 뒤 ‘수졸하게’ 살도록 죽음조차 넘어서는 수행을 시킨 게 아닐까. 그때를 말하듯 그의 작업장 한 구석에는 사관(死關)이라 새겨진 전각이 있다. 글에도 전각에도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모두들 무섭다고 하대예. 하지만 불교에서 보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지요.”
그런 말을 듣고보니 수졸의 졸이 노자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큰 재주는 소박해 보인다)의 졸로 보인다. 대교약졸 아니 그런 생각마저 놓을 때 대교가 가능하다는 경구인 듯하다.
김해/ 글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김해/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20년 연구 끝 염색법 스스로 깨쳐
‘시한부 폐암’ 이기고 10년째 무탈 “전라도의 쪽염 방법은 대궁까지 쪽을 잘라 항아리 속에 넣고 빗물에 재운 다음 석회를 섞어 만든 침전물인 인디고에 잿물을 부어 만든 염료로 염색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쪽잎을 따서 잰다는 말씀이셨습니다.” 10년 가까운 연구 끝에 석회를 쓰지 않고 바로 원액을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됐다. “뭔가 영적인 각성으로 알게 된 듯하다”는게 그의 말이다. 조상들이 붉은색의 쪽이 파란색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듯이. 이제 쪽염색을 해볼 차례. 95년 말께였다. 그때 몸에 탈이 났다. 어느날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폐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소세포암이었다. “의사가 이건 죽어도 살 수 없는 병이라 카데요.” 4개월 가량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아 “쪽염이나 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다음해 2월 퇴원한 뒤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매일 새벽 2시간 참선을 했을 뿐, 다른 치료도 않았지만 방사선 치료 후유증말고는 아픈 데 없이 지금껏 잘 살고 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몇 달이 그에게는 죽음을 화두삼아 살던 기간이었다. 죽음조차 받아들인 뒤 그는 편안해졌다. 하늘이 쪽염법을 깨달은 뒤 ‘수졸하게’ 살도록 죽음조차 넘어서는 수행을 시킨 게 아닐까. 그때를 말하듯 그의 작업장 한 구석에는 사관(死關)이라 새겨진 전각이 있다. 글에도 전각에도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김광수씨가 쪽물 원액을 담은 통을 들여다보고 있다.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