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동안 열심히 미싱을 밟는데도 불구하고 봉제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렵게 산다는 점이 제일 마음 아파요. 나이 들어 시력이 떨어져 미싱을 못 하게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빌딩에 청소하러 다니고 있고요.” 전태일 정신을 구현했던 청계피복 노조에서 부녀부장 등 활동가로 일했던 신순애씨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전태일기념관에서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을 재현해 놓은 다락방을 살펴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드르륵, 드르륵.”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불쌍한 시다(미싱 보조)였던 그를 만나러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향하는 날, 서울 만리동 주택가의 마치코바(동네의 작은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미싱 박음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남은 라디오 소리도 창 밖으로 쏟아졌다. 그는 50여년 전 밤늦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허망한 소리를 무척 싫어했다. “밤 9시55분만 되면 라디오 방송에서는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어서 빨리 부모님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갑시다’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럴 때면 나는 ‘야! 누구는 가기 싫어서 안 가냐? 집에 보내줘야 가지’ 하고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렸다.”(<열세살 여공의 삶>, 신순애, 2014)
라디오 소리는 요즘 봉제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여전히 미움의 대상일까, 괜찮은 친구일까. 상념에 젖은 채로 지난 6일 오후 청계6가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다리) 위 전태일 동상 앞에서 신순애(66·이하 호칭 생략) 선생님을 만났다. 전태일 50주기 문화제 준비로 바쁜데다가 워낙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그곳에서는 도저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못 됐다. 그의 안내로 평화시장 2층의 한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태일도 생전에 가끔 찾았다는 다방은 시간이 오래전에 정지돼 있는 듯했다.
―평화시장 노동자 출신으로서 여기에 오면 느낌이 남다를 것 같아요.
“아직도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마음 아프죠. 저는 지금 미싱을 안 하지만, 그때 동료나 후배들 가운데는 아직도 미싱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미싱 일을 한다는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수십년 동안 열심히 미싱을 밟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게 산다는 점이 제일 마음 아파요. 나이가 들어 시력이 떨어져 미싱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빌딩 청소하러 다니고 있어요. 평생을 일하고도 먹고사는 민생고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가장 슬프죠.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잖아요. 이걸 개인이 아니라 우리 문제로 보지 않고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봐요.”
―우리 문제라면요?
“저는 70년대에 산업화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이렇게 됐다고 봅니다. 파이가 골고루 분배되도록 그때서부터 복지정책을 폈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잖아요. 지금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이제 권력이 자본가에게 가버린 뒤여서 커진 파이를 지금 나누려니까 마치 재산을 뺏는 것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파이를 나누는 방법이 없는 단계까지 와버렸잖아요. 우리가 촛불로 평화적인 시위를 해서 정권과 대통령 하나를 바꾼 것일 뿐 구조를 바꾸진 못했죠.”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무엇인가요?
“예를 들면 국민연금도 전 국민이 되지 않고 일용직이라든지 봉제노동자는 처음에 다 제외됐어요. 그래서 저 같은 봉제노동자는 노후에도 여전히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 각종 연금을 받는 분들은 젊었을 때는 안정적으로 직장 다니고, 노후에는 연금 타서 안정적으로 살잖아요. 이렇게 비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전쟁 때 나라를 구했다고 해서 참전군인들은 계속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잖아요. 물론 목숨 걸고 싸운 건 맞아요. 그렇지만 우리 노동자들도 목숨 걸고 일했잖아요. 결핵, 산재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저희 오빠도 일하다가 손가락 하나 잘렸는데 그때 3만원 받고 끝이었어요. 이제라도 공적자금을 노동 부문에 투여하고, 보편적 복지정책이 펼쳐져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자기 자식을 노동자로 안 만들죠. 자식 등록금도 못 버는 노동자를 누가 권하겠어요.”
“전태일 정신을 잊지 않으려 늘 노력합니다.” 청계피복 노조에서 활동했던 신순애씨가 전태일 50주기를 앞둔 지난 6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위해 서울 청계6가 버들다리 위 전태일 동상을 찾았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신순애는 13살인 1966년부터 평화시장의 한 봉제공장에서 미싱 시다 일을 시작했다. 당시 매달 내야 하는 학비인 월사금을 내지 못해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한 뒤 가족을 따라 고향(전북 남원)을 떠나 상경한 지 2년 만이었다. 꼬마 아이의 나이를 묻지도 않고 받아주는 평화시장에서 그는 이름도 없이 ‘7번 시다’, ‘1번 미싱사’로 불렸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 넘어까지 ‘기계처럼’ 일만 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1971년 미싱 위에서 실신하기도 했다. 1970년 11월13일 숱한 신순애들을 위해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자기 몸을 불살랐지만, 그 사실조차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순종적이고 성실한 ‘근로자’였던 신순애는 1974년 청계피복노동조합(청계노조)이 운영하던 노동교실을 만나면서 당당한 ‘노동자’가 됐다. 1970년 11월27일 결성된 청계노조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얻어낸 성과물이었다. 어머니 이소선(2011년 작고)과 전태일의 평화시장 친구들이 중심이 된 청계노조는 70년대 민주 노동운동의 선봉이었으며, 대학생들과의 노학연대의 고리이기도 했다.
―노동교실은 어떻게 알았어요?
“일하던 공장 안으로 어느 날 중등과정을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유인물이 들어왔어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무료로 가르쳐 준다니까 그걸 들고 찾아갔죠. 갔더니, 다니는 공장과 함께 제 이름을 지원서에 적으라고 해서 신순애라고 썼어요. 제가 평화시장 들어와서 8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이름 석자를 썼어요. 공장에서는 몇년을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이름을 모르는데, 노조에서는 순애씨로 불렸어요. 그때서야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그동안에는 사람이 안 보였어요. 왜냐하면 하나라도 일을 더 해야 하고 빨리 기술을 배워야 하니까 옆에 친구가 기침을 하든 뭘 하든 나하고 상관이 없는 일이었거든요.”
―전태일의 존재도 그때 알았군요?
“네, 노동교실 오픈할 때 지부장이 ‘이 노동교실은 전태일 동지가 우리한테 물려준 유산이니까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서 근로조건도 개선하자’고 해서 속으로 전태일이 누구지 했어요. 같이 갔던 친구에게 눈짓으로 물어보니까 그 애도 모르겠다고 해요. 그다음에 전태일 어머니라는 사람이 단상에 섰어요. 지금도 그때 들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여러분은 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근로 개선을 해야 한다. 하루에 잠바를 열장 만들려고 기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부해서 이다음에 내 자녀를 어떻게 똑똑하게 잘 기를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소리가 절규처럼 들렸어요. 노동교실에서 전태일을 알고 나니까 그것도 모르고 지낸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과 자책감이 들었어요. 우리가 진즉에 함께했더라면 전태일 동지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 노조 활동을 열심히 했죠. 청계노조 선배들이나 저를 포함한 모두가 그런 마음이었기에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거죠. 두번 다시 우리 동지가 죽게 하면 안 된다는 마음들이 있었죠.”
신순애씨는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평화시장 미싱 시다의 실제 모델이었다. 신씨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전태일기념관에 전시해 놓은 고 조영래 변호사 사진과 <전태일 평전>을 살펴보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신순애는 자기가 일하던 공장의 노동자 33명 중 32명을 노조에 가입시킬 정도로 노조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1976년 봄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근무시간을 저녁 6시로 단축하는 투쟁을 할 때였다. 공장장이 정면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오야(최고 숙련) 미싱사인 신순애는 미싱을 세웠다. “나는 속으로 전태일 생각을 했다. ‘그래, 전태일 동지는 우리를 위해 목숨도 끊었는데 해고되면 또 다른 싸움을 해보지’ 하면서 가장 먼저 미싱 모터 스위치를 껐다. 이어서 뚝, 뚜둑, 뚜둑 소리가 연발했다.”(<열세살 여공의 삶>) 그즈음 그는 이소선 어머니의 소개로 조영래 변호사(1990년 작고)를 만났다. 신순애가 조 변호사에게 들려준 얘기는 <전태일 평전>에서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의 생생한 실태가 됐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계노조는 박정희 정권에 눈엣가시였다. 박 정권은 1977년 7월 장기표 재판 과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고, 이어 노동교실을 폐쇄했다. 노동교실 사수 투쟁으로 신순애는 다른 조합원 4명과 함께 구속됐으며, 약 1년 동안 옥살이(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를 했다.
―청계노조에서 청춘을 뜨겁게 보내셨어요.
“정말 그랬어요.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은 한글교실이었어요. 1977년 노동교실이 폐쇄된 뒤 모여서 공부할 장소가 없어졌잖아요. 다들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돈 5만원을 내서 방을 하나 구했어요. 버스비 10원도 아까워 출퇴근때 두시간 거리를 걸어다녔던 저로서는 엄청난 일이었죠. 이건 얼마가 들더라도 써야 할 돈이라는 판단이 들더군요. 그 방에서 한글을 모르던 노동자 7~8명에게 제가 한글을 가르쳤어요. 처음에는 대학생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노동자들이 쑥스러워서인지 떨떠름하게 반응해서 제가 맡았지요. 저는 ㄱ, ㄴ, ㄷ을 가르친 게 아니라 각자 일하던 공장 이름과 주변 사람 이름을 익히는 방식으로 가르쳤어요. 빨리 익히고, 다들 좋아했어요. 근무시간 단축을 이뤄낸 것도 정말 큰 의미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가슴 뿌듯했던 것은 1980년 퇴직금 투쟁이었어요. 당시 법으로는 근로자 16명 이상이어야 퇴직금을 받게 돼 있었는데 우리는 10명 이상이면 받도록 하는 투쟁을 해서 이겼어요. 전태일씨가 지키라고 요구했던 근로기준법 규정 이상의 것을 최초로 쟁취했으니까 정말 큰 의미가 있었죠.”
―굉장한 성과였군요.
“저는 전두환 정부가 1981년에 청계피복노조를 강제 해산만 시키지 않았으면 지금 평화시장 후배 노동자들의 생활이나 환경이 이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요. 그때 우리 목표가 뭐였냐 하면 평화시장 옆에 있는 동화시장 옥상에 기숙사를 만드는 거였어요. 아마 성공했을 것이고, 노조가 다른 복지사업도 잘했을 거예요. 그런데 정부가 노조를 강제로 해산해서 이 일대의 노동조건이 이렇게 열악한 상태가 계속되고 말았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일을 과하게 시켰던 사업주보다 정부에 더 화가 나요. 내가 사업주라도 돈 덜 주고 일 많이 시키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정부는 다르잖아요. 근로자가 너무 세면 근로자를 살짝 눌러주고, 사장이 너무 세면 사장을 눌러서 약한 쪽을 살짝살짝 도와주는 시소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무조건 다 사업주 편을 들었고, 심지어는 우리를 빨갱이로 몰면서 사람으로 안 봤잖아요. 저는 요즘 노조 같은 데 가서 강의하면 그렇게 말해요. ‘여러분을 종북으로 모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라, 종북이 뭐가 두렵냐, 우리는 빨갱이로 몰리고도 끄떡없이 살았고 투쟁했다’고 말입니다.”
신순애는 1980년 전두환 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그해 말 다른 청계노조 간부들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1981년 1월 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이에 항의하는 투쟁을 준비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2년 넘게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1983년 청계노조 활동가(박재익)와 만나 결혼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와 남편의 취업을 철저하게 막았다. 형사가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바람에 결혼 뒤 2년 동안 무려 18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노동자로서 노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여야 하는데 그때는 그렇게 감시까지 당했군요.
“가는 데마다 해고를 당했어요. 사장들이 그러더라고요. ‘신순애가 그렇게 일을 잘해도 압력 때문에 일을 시킬 수 없다’고요. 그래서 집에 미싱을 차려 놓고 남편이랑 제가 아는 사람들한테 몰래 일거리를 받아와서 근근히 살았죠. 저희를 감시하는 형사가 자기 딴에는 측은해 보였는지 한번은 쌀 8㎏을 사 왔더라고요. 그 쌀이 독약처럼 느껴지면서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제발 좀 꺼지라’고 소리치면서 길바닥에 쌀을 다 버렸어요.”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어요?
“배운 게 미싱뿐이어서 1988년까지는 집에서 근근히 미싱 일을 했어요. 올림픽 할 때는 태극기를 만들어서 팔기도 했는데 올림픽 끝나고는 과감하게 미싱을 팔아버리고 관뒀어요. 아무리 계산을 해도 미싱으로는 두 아이를 도저히 대학에 못 보내겠더라고요.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돈을 빌려서 김밥 가게를 시작했어요. 남편은 전기공 생활을 했고요. 새벽 3시부터 가게 문을 열고 휴일도 없이 김밥을 쌌어요. 동네 사람들은 저러다가 언젠가는 쓰러지지 하면서 늘 저를 쳐다봤다고 해요. 그러나 평화시장에서 고생한 것에 비하면 김밥집은 별로 힘든 것도 아니더라고요.(웃음) 돈도 꽤 벌었어요.”
김밥집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인 1997년 그는 아동·청소년 성폭력 치유 및 상담 센터인 ‘청소년을위한내일여성센터’(현 ‘청소년 탁틴내일’, 이사장 최영희)의 문을 두드렸다.
“저나 남편이나 바쁘기도 했고, 공부는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라는 생각에서 아이들이 클 때 모든 것을 방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중학교 1학년이던 작은딸이 ‘엄마, 남자랑 자면 애기가 생긴다는데 왜 나는 애기가 안 생기냐’고 묻는 거예요. 그 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아, 내가 딸을 둘 키우는 엄마로서 너무 사춘기 교육 준비가 안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신문에서 성교육 강사 프로그램 소식을 보고 무작정 찾아갔죠.”
청계피복 노조 전 부녀부장 신순애씨가 11월6일 오후 전태일 열사가 생전에 들렀던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2층의 명보다방에서 당시 노조 활동과 공안당국의 탄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탁틴내일에서 청소년들에게 최고 인기강사였던 신순애는 2003년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해 쉰세살인 2006년 마침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대학원에 진학해 평화시장 여공의 생애사 연구로 2012년 석사 논문을 썼다.
“탁틴내일에서 일할 때 만난 소년원 재소자 등 이른바 문제 아이들한테 제 별명이 스타였어요. 제가 살아온 이력 등을 말하면 자기들과 통하는 데가 있어서인지 아이들이 울먹이기도 하는 등 저를 잘 따랐어요. 그러나 저는
전국의 소년원을 다 다니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그러자면 내가 더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저였죠.”
―대학원까지 마치는 데 그 계기가 <전태일 평전>이었다고요?
“2007년에 제가 김수행(2015년 작고) 교수님 수업을 들었는데 중간시험 리포트를 쓰면서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어요. 다른 학우들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서 혼났다고 하는데 저는 눈물이 안 나는 거예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평전의 내용보다 제가 훨씬 더 힘들게 산 거예요. 예를 들면 평전에는 생리대가 없어서 겪었던 고통 등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고, 불쌍한 여공으로만 나오잖아요. 정말 내가 불쌍하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런 내용을 썼어요. 그 뒤 김 교수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대학원까지 갔고, 생애사 논문을 썼죠. ‘100년 후를 생각해 봐라, 전태일 평전과 함께 신 선생의 생애사가 같이 있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교수님의 얘기에 공감이 갔거든요.”
그는 졸업 뒤에도 탁틴내일에서 청소년인권센터소장을 맡아서 오랫동안 일했다. 3년 전 무릎 수술로 건강이 안 좋아져 소장직을 내려놨지만, 특강 등 청소년 상담가로서의 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미혼모 쉼터 확충 등에도 앞장서고 있다.
―노조 활동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후회한 적은 없어요?
“갈림길이 있었어요. 1974년도 12월 저녁 8시까지 1차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투쟁을 하고, 노조에 모였어요. 몇명만 남아 밤을 지샜는데 엄마가 걱정돼서 새벽 통행금지가 풀린 뒤 집에 갔다 오겠다고 이소선 어머니한테 말하고 농성장을 나왔어요. 집에 가서는 철야했다고 거짓말로 안심시켜 드리고 밥 먹고 출근길에 나섰죠. 평화시장 앞에 와서 이쪽으로 가면 노동교실, 저쪽으로 가면 회사였어요. 그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잠깐 고민을 했어요. 그때까지 한번도 공장에 결근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내 몸이 노동교실로 가고 있더라고요. 갔더니 이소선 어머니가 ‘저기 까만 바바리(한여름만 빼고 입고 다닌 옷에서 얻은 별명) 온다’면서 엄청 반겼어요. 회사로 안 가고 설마 여기로 다시 올까 생각했다고 해요. 스물한살 정도였는데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는 게 저한테도 너무 대단한 거예요. 그런 선택을 한 저 자신에 대해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덕분에 지금까지도 이렇게 당당한 나로서 살 수 있었고요.”
―그런 만큼 선생님에게 전태일은 남다를 것 같아요.
“아주 쉬운 말로 바보를 깨우치게 해준 사람이죠. 바보인 줄도 몰랐는데 바보인 줄 알게 해준 사람.(웃음) 정의와 공정 등 그가 남긴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제 스스로 늘 노력합니다.”
그는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감독 이혁래·김정영)에도, 1977년 투쟁 때 함께 구속됐던 옛 동지 임미경, 이숙희 등과 함께 출연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