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15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평화나비 네트워크’가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무시한 ‘12.28 한일 합의’와 ‘화해치유 재단’ 설립을 규탄하는 활동극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인 2015년 12월31일. 활동가 김샘(27)씨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농성을 하다가 연행돼 재판에 넘겨졌다. 그때 89살이던 김복동 할머니가 면회를 왔다. 그리고는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고 했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여성운동가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는 첫번째 추모의 밤’ 추모제에서 김씨는 “2012년 비오는 8월, 비를 맞으면서도 꼿꼿하게 앉아계신 할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 인생 처음 존경할만한 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며 “수요시위 처음 가면서 할머니께 무언가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착각이었다. 수요시위라는 자리는 할머니들께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자리이고 받는 자리였다. 우리는 할머니 덕분에 평화 인권을 배울 수 있었고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가 평소 수요시위에서 ‘할매나비가 앞에 날 테니 대학생 나비도 함께 날자’고 말하면 이와 호응해 함께 싸우던 대학생 동아리가 있다. 전국 대학생들의 프로젝트 동아리인 ‘평화나비 네트워크’(평화나비)다.
평화나비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꾸린 동아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뜻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대표적인 청년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할머니와는 수요시위, 재일조선학교 방문, ‘12.28 한일합의’ 이후 농성 등을 함께 하며 연대해왔다.
평화나비가 연 이날 추모제에서 회원 김수현씨는 “할머니는 ‘다른 손이 내 손을 잡는 게 싫다’고 했지만 실은 언제나 이 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분이셨다”며 “어떤 고난이 있어도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추모제에서 입을 모아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를 받지 못하고 떠났다”며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김씨는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평화나비 동료들과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서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한 적 있다”며 “그런데 아직 사과도 받지 못해 너무나도 후회된다”고 말했다. 최나현(26) 전 평화나비 대표도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은 세상이 많았는데 할머니의 빈소를 보며 무겁고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털어놨다.
지난 29일 오후 7시께 열린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는 첫번째 추모의 밤’ 행사에서 평화나비 회원들이 김 할머니를 추모하며 노래 ‘네버엔딩 스토리’를 부르고 있다.
평화나비 회원들은 김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은 청년 세대로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충청 평화나비 소속 회원인 현지민씨는 “예전 수요시위 때 할머니가 ‘여러분, 함께 싸워줄 수 있죠?’라고 말했다”며 “그 말씀대로 항상 김 할머니와 다른 할머니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나비’들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평화나비 네트워크 6기 대표인 이태희(23)씨 또한 “할머니가 바란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며 “할머니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할머니들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강조했다.
최 전 대표는 30일 <한겨레>의 통화에서 “2월1일 영결식에서 최대한 많은 대학생을 모아 마지막 가시는 길 잘 보내드리려고 한다”며 “할머니가 생전에 바라셨던 삶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기억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며, 일본으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또 할머니가 생전 연대하셨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재일동포 지원문제 등에도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김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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