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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노사 손잡고 ‘산재 막아라’…독일, 사망률 ‘0’에 도전

등록 2018-12-01 04:59수정 2018-12-03 13:53

[보이지 않는 죽음, 산업재해] ③ 참여해야 안전하다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기술감독관이 건설현장에 감독을 나가 현장 관리자,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제공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기술감독관이 건설현장에 감독을 나가 현장 관리자,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제공
지난 11월2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한 공사장은 지반을 다지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아직 건축물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라 크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산업재해 전문가의 생각은 달랐다. <한겨레>와 동행한 베른트 메르츠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BG) 예방국 부국장은 트럭이 다니는 길 옆에 자재 더미를 쌓아두면 위험하다고 현장 소장에게 말했다. 산업재해 예방을 중시하는 재해보험조합의 원칙에 따른 조언이다.

“독일에는 공사장 내 차량 동선에 대한 안전기준이 있어요. 예컨대 차가 후진하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움직이는 등의 원칙이죠.” 메르츠 부국장은 건설현장에서 후진하는 차량에 치여 숨지는 노동자가 1년에 서너명씩 생겨서 만들어진 규정이라고 덧붙였다.

재해보험조합은 독일에만 있는 독특한 산업안전 관리기구다. 노사 동수로 구성된 재해보험조합은 공동 자치로 운영된다. 한국에선 안전보건공단과 근로복지공단이 맡는 산재 예방·재활·보상 업무를 여기서 총괄한다. 연방국가인 독일의 정부가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침을 만들고 관리한다면, 재해보험조합은 연방법 체제 아래 각 사업장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 안전기준을 만든다. 건설 등 산업별로 나뉜 상세한 기술수칙이 여기에 포함된다. 재해보험조합은 산업별, 지역별 지부도 두어 현장을 감독한다.

독특한 기구 ‘재해보험 조합’
노사 공동 자치로 운영
산재 예방·재활·보상 업무
정부는 보편적 지침만 주고
구체적 안전 수칙은 조합이 결정

보상여부도 조합 전권
노동자가 산재 입증하려
회사와 싸우지 않아도 돼
사용자도 고의 아니면
민사상 책임 면제

재해보험조합은 독일 산업발달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80년대 독일 비스마르크 정권이 사회보험 체계를 만들자 업종별 사용자 단체가 국가의 간섭을 피하려고 재해보험조합을 구성해 재해보험 운영권을 얻어낸 것이 그 시초다. 정부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만든 기구지만, 1951년부터 노동자도 동등하게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공공성이 강화되고, 안전기준도 촘촘해졌다. 이는 독일 노사협력의 뿌리가 깊어 가능했다. 독일은 사업장 안전 문제를 ‘사업장평의회’에서 노사가 공동 결정하도록 법제화했고, 상시적인 노사 협력이 이뤄진다. 그 결과 독일은 현재 10만명당 산재 사고 사망자가 한명이 채 안 된다. 네덜란드·스웨덴·영국과 더불어 유럽의 대표적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꼽힌다.

지난 11월2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한 건설현장에서 안 전관리자(오른쪽)가 안전설비 관리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베를린/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지난 11월2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한 건설현장에서 안 전관리자(오른쪽)가 안전설비 관리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베를린/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영국이 ‘기업살인법’을 통해 산재를 처벌로 다스린다면, 독일은 재해보험조합을 중심으로 노사 협력을 통한 ‘예방’에 집중한다. 예방의 핵심은 잦은 현장 방문이다. 이날 찾은 베를린 공사장도 한달에 두차례씩 재해보험조합·주정부·회사 관계자가 모여 현장을 살피는 안전점검을 받는다. 이처럼 모든 건설현장에서 현장점검이 매월 두차례 철저하게 이뤄진다. 메르츠 부국장은 “정부 감독관이 ‘경찰’이라면 재해보험조합의 기술감독관은 ‘협력자’”라고 말했다. 정부 감독관은 안전보건 법규를 제대로 지키는지 사업장을 감독하고 처벌한다. 기술감독관도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사업정지 조처를 내릴 수 있지만 주로 안전기준을 지킬 수 있도록 조언하는 데 집중한다. 산재 보상은 재해보험조합의 권한이다(그래프 참고). 공사 초기부터 수시로 개입해 필요한 안전설비를 추천하는 등 실제로 적용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식이다. 이런 기술감독관이 독일 전체에 약 3천명이다.

사업주도 산재 사고가 생기면 노동관청이 아니라 재해보험조합을 먼저 찾는다. 산재 보상 절차 전반이 재해보험조합을 거쳐 처리되기 때문이다. 기술감독관은 사고가 나면 정확한 결과를 위해 8시간 이내에 조사를 마치고 사고 원인을 분석한다. 독일 노동자는 산재를 입증하려 회사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재해보험조합이 병원 보고를 바탕으로 산재 여부, 보상 수준을 직권으로 결정한다. 또 사용자는 고의로 산재를 일으킨 경우가 아니면 민사상 책임을 면제받지만 회사의 산재보험료율이 인상된다. 보험료를 줄이려면 산재율을 낮춰야 하는 구조다. 카를하인츠 뇌텔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회장은 “독일처럼 예방과 보상을 통합해 노사가 참여하는 기관에 맡기는 걸 추천한다. 예방이 최우선 목표가 되면 보상 비용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매달 2차례 현장으로
조합 기술감독관 3천명
주정부·회사쪽과 공사장 점검
계획·설계 단계부터 밀착
산업표준 바꾸고 설비 추천

처벌보다 예방 주력
뿌리 깊은 노사 협력 바탕
“현장 가장 잘 아는 노동자
참여 보장해 재해율 낮춰”
10만명당 산재사망 1명 아래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재해보험조합은 산재 보상 처리뿐 아니라 사고 원인을 분석해 안전기준을 제·개정하기도 한다. 안전기준은 계속 변경되는데, 지난 10월 양쪽 기둥(세로대)이 평행인 사다리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나 사다리의 윗단보다 아랫단을 넓게 생산하도록 산업표준이 바뀌었다. 규정이 이렇게 ‘현장 밀착형’으로 세밀해진 배경에는 재해보험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사 양쪽의 경험이 녹아 있다. 현장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해 재해율을 낮춘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진 독일 노사의 적극적 대응은 산재를 대하는 사회인식까지 바꾸었다. 메르츠 부국장은 “독일에서는 사고가 나더라도 개별 작업자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설업 산재 사고 원인을 추적해보면 노동자가 영향을 줄 수 없는 계획·설계 단계부터 문제인 경우가 많다”며 “예방 조처는 강구하지 않고, 안전모 착용 등만 강조하면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건설업 산재 사망사고의 28%는 계획, 35%는 설계 단계에 원인이 있다고 추산하는 국제노동기구의 연구 결과는 독일의 대응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증명한다.

베를린/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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