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설치된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업무준비를 하고 있다. 6월15일까지 운영하는 특별신고센터는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대상이며 피해자뿐 아니라 대리인도 신고할 수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동조합이 없을 때는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방법이 없었어요. 우리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진다기에 ‘기회’라고 생각했죠.”
대구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김아무개씨는 지난해 2월 직장에 새로 노조가 결성된다는 소식에 용기를 얻었다. 그간 고위 임원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마땅히 호소할 곳이 없었던 터였다.
실제 이 업체 노조는 김씨를 비롯한 피해자 다수의 증언을 모아 대응에 나섰다. “격려 차원으로 보인다”며 해당 임원에게 아무 조처를 하지 않은 회사에 맞서 노조는 지역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했다. 근로감독관 조사에서 성희롱 사실이 인정됐고, 가해자는 2개월 정직에 전환배치 처분을 받았다. 김씨는 “노조가 없으면 문제가 있어도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 노조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미투’ 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직장 내 권력형 갑질을 견제할 노동조합이란 지적이 나온다. 유명인들과 달리 미투 폭로로도 사회적 반향을 끌어내기 쉽지 않은 일반인들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특히 노조를 통한 대응이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를 보면, 직장인 1150명(여성 698명, 남성 452명) 가운데 45%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 가해자가 상사인 경우가 51.7%, 고용주가 13.7%로 나타났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는 노조 움직임도 체계화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2016년 산별중앙교섭을 통해 ‘의료기관 내 폭력 근절을 위한 매뉴얼’을 도입했다. 매뉴얼을 보면, 보건의료노조의 지부가 있는 170여개 병원은 직장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지하면 곧바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하며,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에게 ‘유급보호휴가’를 주고 필요한 상담치료를 지원해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징계위원회를 열고 피해자가 여럿일 경우 해당 부서에 대한 실태조사도 벌인다.
지난해 5월 한 공기업에서 성추행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이런 단체협약이 제구실을 했다. 피해자 2명이 6~7년간 지속한 상사의 성추행을 고발했고, 가해자는 징계해고됐다. 이 노조는 2011년 회사 쪽과 직장 내 성폭력 사건 발생 때 노사가 함께 진상조사위원회와 징계위원회를 꾸리기로 한 바 있다. 당시 사건을 맡아 대응했던 노조 관계자는 “징계해고까지 끌어낼 수 있었던 건 단체협약 덕분”이라고 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여성 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면 으레 성희롱·성추행을 막아달라는 민원부터 제기된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은 사내 권력구조와 관련된 문제다. 노조는 단지 피해자의 대리인이 아닌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 함께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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