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경기 수원시 삼성디지털시티 정문 앞에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인정하고 즉각 보상하라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아직도 거리에 있다. 삼성은 직업병 문제 해결하라!”
20일 오전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정문 앞, 갑자기 닥친 강추위를 무색케 하는 외침이 율려퍼졌다.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인정과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을 비롯해 진보 성향 정당들과 노동계, 시민사회단체, 인권단체 등 100여개 단체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하자 말라!”며 삼성 쪽에 대화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날은 반올림이 설립된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반올림이 서울 강남역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한지 776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앞서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숨졌다. 유가족은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보상 신청을 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첫 산재 신청은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그해 11월20일, 19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발족 당시만 해도 반도체 노동자로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한 피해자는 황씨 가족이 유일했다. 그러나 삼성 뿐 아니라 다른 반도체 공장들에서도 노동자들이 병에 걸리거나 숨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대책위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로 단체명을 바꾸고 반도체 직업병 산재에 대한 진상조사와 보상 운동을 본격화했다.
반올림은 지난 10년 동안 국내 반도체 관련 업계에선 393명의 노동자가 직업병 발병을 호소해왔고, 그 중 144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 에스디아이(SDI) 등 삼성 계열사에서만 발병 제보가 320명, 사망자는 118명으로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산재 인정률은 매우 낮다. 반올림에 따르면, 지금까지 94명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고, 겨우 12명만이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불인정 대상자 35명 중 25명은 행정소송을 제기해 10명이 산재 확정 판결을 받았다. 나머지 대다수는 피해자가 업무와 발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길고 어려운 ‘인정 투쟁’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직원들이 모니터로 제품 설계도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산재신청 질병을 유형별로 보면, 백혈병이 22명으로 가장 많으며, 유방암(12명), 비호지킨 림프종(10명), 뇌종양(9명), 폐암(6명), 재생불량성빈혈(5명), 다발성경화증(4명) 등이 뒤를 이었다. 반도체 노동자들은 이밖에도 갑상선암, 난소암, 골육종, 골수이형성증후군, 파킨슨병, 루게릭병 등 흔치 않은 온갖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올림은 기자회견 성명에서 “노동자들은 젊은 시절을 꼬박 투병으로 보냈고 그 끝은 처참했다. 아픔을 간직한 채 세상을 뜨거나 후유장애로 또 다른 고통을 마주했다”며, “직업병 피해자들을 더욱 분노케 했던 것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면한 삼성의 냉정한 민낯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질병이 꼭 반도체 공장 노동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반올림은 객관적이고 신뢰할만한 진상조사, 나아가 법원의 판결에 따른 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 쪽이 “직업병 문제는 개인의 질병으로 업무와 무관하다”며 외면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에서 산재가 인정되었음에도 삼성은 여전히 직업병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1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김정숙 부장판사)는 삼성전자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 손경주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시사저널>이 19일 보도했다. 손씨는 2003년 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설비 유지보수 하청업체의 현장소장으로 일했다. 이어, 그 직후부터 2009년 5월까지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또다른 하청업체 현장소장으로 일하다가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을 얻어 치료를 받았으며, 2012년 1월 병이 재발해 7개월만에 숨졌다. 반올림은 2013년 7월 손씨를 비롯한 10명의 반도체 노동자들의 집단 산재 신청을 냈었다.
손씨 유족의 소송을 맡은 재판부는 “손씨가 하루에 8시간 가량을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에 상주하거나 순찰을 하며 안전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유해 화학물질에 장시간 노출돼 발병했다”는 유족 쪽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 판결은 반도체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직접 부품을 만지는 현장 노동자나 엔지니어가 아니라 관리자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발병의 업무 연관성을 인정한 판결이어서 주목된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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