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투 투쟁기록 사진집
오늘 해고노동자 조수원 20주기 맞아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성수씨 사진묶어 펴내
오늘 해고노동자 조수원 20주기 맞아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성수씨 사진묶어 펴내
흑백사진 속 해고노동자들이 있습니다. 1991년에서 1996년까지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은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를 만들어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섭니다. 단식농성을 벌이고 경제단체와 해고사업장을 항의 방문하는 등 분투를 벌였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그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 얼룩져 있습니다. 전해투의 투쟁은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제 해고노동자들은 너무도 흔합니다. 쌍용자동차와, 기륭전자, 재능교육 등 곳곳의 사업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리어 전국이 새남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 노동자마저 쉽게 해고할 수 있는 ‘해고천국’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빛바랜 사진 속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이 마냥 추억이 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스물일곱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조수원. 가난한 형편에 병역특례업체에 취업을 했지만,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특혜 만료 6개월을 앞두고 해고됐습니다. 당시 방위산업체들은 병역 특례 문제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회사에서 해고가 되면 그동안 근무한 것은 모두 무효가 되고 바로 군에 입대해야 하는 점을 악용한 것입니다. 결국 병무청은 그에게 군대 징집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하며 입영 연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수배자 생활 끝에 1995년 12월15일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의 20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고 전해투 투쟁을 기록하기 위해 남은 이들이 사진집 <해고 없는 세상을 꿈꾼 사람들>(검둥소 펴냄)을 펴냈습니다. 모두 사진작가 조성수씨의 작품으로 아래 사진들은 그 사진집 가운데 일부입니다. <타임>지가 인정한 다큐사진작가 조성수씨는 당시 전해투 노동자들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이 사진들을 찍었다고 합니다.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가 당시 현장을 전하는 것은, 정부의 노동개악으로 해고자들의 싸움이 다시 전국적으로 반복될 위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1차 투쟁 1993년 4월 1992년 대통령선거 이후 노동현장은 더욱 침체되어 갔다. 전국에서 모인 해고자들은 기독교회관에 모여 18일간 철야 단식농성을 진행하였고, 구속, 수배, 해고자 문제는 사회적 관심을 일으켰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2차 중앙 집중 투쟁 1993년 5월31일∼7월3일 전국에서 모인 해고자들은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전국해고노동자대회를 마친 뒤 마포 민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한다. ‘경제 5단체장의 해고 노동자 복직 공동선언’을 목표로 경제 5단체장과 해고자 발생 사업장 항의방문 투쟁을 이어간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가을 결사 투쟁 1993년 9월11일∼10월18일 9·11 전국해고노동자대회에서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8명이 삭발단식투쟁을 선언한다. 단식 30일이 지나도 아무런 해결책이 없자 전해투 동지들은 구속을 각오하고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한다. 단식 38일. 노동부의 전향적인 태도와 전노대의 대중투쟁 약속을 믿고 단식은 중단됐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해고 발생 사업장 전국 순회투쟁 1993년 10월19일∼12월4일 노동부는 해고자 복직을 위해 노력했으나 해당 기업주가 반대하므로 해고발생 사업주를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보라고 제안한다. 이에 전해투는 서울 수도권을 비롯하여 울산, 경주, 포항, 마산, 창원, 광주, 대구 등 46개 해고 발생 사업장을 찾아가 44개 사업주와 교섭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앞세운 무자비한 폭력을 뚫고서야 사업주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1994년 상반기 투쟁 정부와 사업주가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전국의 해고 노동자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3월 7일부터 서울, 인천, 성남, 경기남부, 마산, 창원, 대구, 포항, 울산, 부산, 광주를 비롯하여 한진그룹, 대우그룹, 럭키금성그룹, 전국의료보험 등 전국 20여 개 사업장과 본사 앞에서 동시다발로 텐트농성에 들어갔고, 45개 사업장에서 출근투쟁과 지역별 노동청 항의투쟁도 이어졌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결사투쟁 1994년 4월16일∼5월22일 4월16일 전국해고노동자대회에서 전해투는 삭발단식을 선언하며 결사투쟁을 결의한다. 5월14일 정부의 ‘노경총 사회적 합의’에 반대하여 ‘경총합의 분쇄! 어용노총 해체’를 외치며 한국노총을 점거한다. 경찰과 노총의 폭력 진압에 구속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점거농성을 계기로 노총 탈퇴운동도 가속화된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대중투쟁 결합기 1994년 5월23일∼7월25일 전해투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경동산업, 한진중공업, 효성중공업, 기아자동차, 영창악기, 대우정밀 등 100여 명의 해고노동자가 복직을 이뤄낸다. 하지만 중소사업장의 해고자와 병특 해고자 문제는 요원하기만 했다. 전기협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 쟁의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이어지면서 공안 분위기와 함께 노조간부에 대한 구속, 수배, 해고가 이어진다. 결국 전해투는 단위 사업장의 임단투와 결합한 대중 투쟁을 끌어내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머리띠를 묶는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1995년 12월15일 조수원이 서울 여의도백화점 7층 민주당사 안 비상계단에서 자살했다. 사진가 조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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