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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뉴스AS] 야금야금…노동자 옥죄는 대법원 판례의 ‘진화’

등록 2014-11-14 15:17수정 2022-08-18 17:41

[뉴스 AS]
대법원의 쌍용차 판결, 정리해고 판례 ‘보수화’ 연장
근로기준법 24조 해석, 사용자에 유리하게 지속 확장

대법원 판결은 물론이고 하급심 판결에서도 판사들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판례란 동일하거나 비슷한 소송 사건에 대한 기존 재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인용’한다는 건 결론을 내리기 위해 끌어다 쓰고 근거로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판례엔 힘이 있습니다. 법원조직법은 “상급심 판결은 그 사건에 관하여만 하급심을 기속(구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끌어다 쓴 (다른 사건의) 판례가 해당 재판의 결론을 규정하진 못합니다. 그렇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판례는 수많은 판결의 근거 구실을 하고 있으며 판결의 결론을 강화하는데 이용됩니다.

그래서 한번 성립된 판례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즉 대법원 판례는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이 출석한 전원합의체에서 과반수 이상이 찬성해야 변경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바꾸기 어려운 판례지만,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진화’는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존 판례를 끌어 오면서 새로운 시각과 결론이 보태지면 판례는 일정 방향으로 강화되기도, 약화되기도 합니다. 13일 대법원이 선고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무효소송 판결(‘해고의 자유’ 재계 요구 폭넓게 인정…노동자 생존권엔 등돌려)은 대법원 판례가 경영자 친화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경영자의) 해고의 자유를 확장했다’고 평가받는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가 내린 13일 판결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향후 손실액 추정은 보수적으로 이뤄졌더라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와 “정리해고는 경영 판단의 문제에 속하므로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입니다. ‘핵심’이란 말은 향후 비슷한 사건의 재판에서 판례로 인용될 만한 내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손실액 추정은 보수적으로 할 수 있다”

‘보수적’이란 말을 무슨 얘기일까요? 항소심 판결을 보면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항소심은 “정리해고는 근로자의 잘못이 없는 근로관계 단절이므로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정리해고의 근거가 되는 손실액 추정은 노동자의 ‘밥줄’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정리해고에 이르는 과정엔 노동자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손실이 얼마나 예상되는지를) 철저하고 엄격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대법원은 “보수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보수적’이라는 뜻은 ‘회사에 유리하게’와 비슷한 말입니다. 결국 손실액은 크게 추정되고, 예상가능한 손실액이 늘어날수록 해고해야 할 노동자가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정리해고는 경영판단의 문제이므로 경영자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이 논리는 기존 판례에서 끌어왔습니다. 2013년 6월13일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동서공업 주식회사의 해고 노동자들이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 최종심에서 이와 같은 판단을 근거로 노동자들이 승소했던 원심을 뒤집었습니다. “기업의 잉여인력 중 적정한 인원이 몇 명인지는 상당한 합리성이 인정되는 한 경영 판단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번 쌍용차 판결의 ‘어머니’인 셈입니다.

쌍용차 판결의 ‘어머니’ 판례 역시 백지 상태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어머니’ 판례의 ‘어머니’는 2002년 대법원 판례입니다.

“정리해고를 하는 경우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경영상의 필요라 함은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고용인원의 감축이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대법원 2002년 7월9일 선고 2001다29452 판결)

근로기준법 24조는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2년 판례는 근로기준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경영상의 필요’의 범위를 사용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확장한 판례입니다. 내용을 좀더 보겠습니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의 기준 역시 확정적·고정적인 것은 아니고 당해 사용자가 직면한 경영 위기의 강도와 정리해고를 실시하여야 하는 경영상의 이유, 정리해고를 실시한 사업 부문의 내용과 근로자의 구성, 정리해고 실시 당시의 사회경제상황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사용자가 해고의 기준에 관하여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대표와 성실하게 협의하여 해고의 기준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면 이러한 사정도 해고의 기준이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인지의 판단에 참작되어야 한다.” 정당한 해고인지 보려면 여러 사정을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자,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용자와 비교하자면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해고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경영상 이유’로 해고할 수 있도록 규제(24조)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재판부를 거치면서 “해고의 기준은 여러 사정을 따져봐야 한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기업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2002년) →“정리해고는 경영자 판단을 존중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2013년)→“정리해고의 근거가 되는 손실액 추정은 보수적으로 할 수 있다”(2014년)로 퇴보했습니다. 사용자 편으로 ‘진화’한 셈입니다.

13일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참여연대가 내놓은 평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여연대는 “정리해고는 사측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귀책사유가 없는 노동자의 생계를 박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리해고는 사측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겨져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 신중하고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외국 사례도 덧붙였습니다. “유렵의 경우 기업이 정리해고를 단행하려 하면 정리회고를 회피하고 예방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쌍용차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국가가 직접 나서 물리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를 몰아내고 탄압한다. 결국 정리해고는 사측 판단에 맡겨지고 국가는 노동자와 시민의 생존권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웬만해선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해고의 자유를 확장시켜준 대법원의 쌍용차 판결은 이후 무수한 관련 사건들에서 다시 인용되면서 진화와 퇴보의 과정을 거치겠지요. 부디 그 진화와 퇴보의 과정이 “당사자의 애환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박병대 대법관 취임사 2011년 6월2일),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다수의 그늘에 묻혀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는”(박보영 대법관 취임사 2012년 1월3일) 방향이길 바랍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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