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만든 비정규직 투쟁 홍보 포스터.
민노당 여성위 등 “남성 이성애자 관점” 비난에 ‘폐기’ “벤치에 남녀가 앉아 있다. 남자가 여성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이들 머리 위에는 ‘우리 정규직되면 결혼하자. 비정규법 통과되면 큰일인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만든 비정규직 투쟁 홍보 포스터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불안한 고용여건과 낮은 임금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결혼에 빚댄’ 이 포스터는 지난달 26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배포되자마자 집중 포화를 맞았다. 당내 여성위원회와 성소수자위원회가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하다”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날 최현숙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은 “결혼한 정규직 노동자만이 정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어 결혼하지 않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며, 사진 역시 남성 이성애자 중심이어서 여성·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항의했다. 박인숙 여성부문 최고위원도 “포스터에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여성위와 성소수자위는 29일과 30일 각각 논평을 발표,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결혼과 성별분업을 둘러싼 잘못된 관행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담고 있다”며 홍보물로 적합하지 않은 포스터의 폐기를 주장했다. 중앙위원회 또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포스터 폐기를 공식화했다.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며, 남성만 생계부양자라는 법 없다!” “첫째, 우리나라 비정규직 확산은 기혼자, 그 중에서도 여성을 겨냥하고 있어 비정규직 노동자의 70%가 여성이다.”
“둘째, 포스터에서 여성은 결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묘사, 남성이 생계부양자이며 여성이 피부양자라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투영돼 있다.”
“셋째, 비정규직 문제로 가장 고통받고 차별받는 여성노동자가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주체가 아닌 협력자로 그려지고 있는 등 성인지적 관점이 반영되지 않았다.”
“넷째, 결혼의 주체를 남성과 여성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결혼의사가 없는 비혼자,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성소수자 등 다양한 가족형태 구성원을 타자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이런 지적에 당 내부에서는 포스터 제작에 신중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박문서연씨의 경우처럼 민노당 홈페이지에 “글이 참 명쾌하다”며 동감의 뜻을 밝히는 당원들도 나왔다. 민노당 비정규운동본부는 결국 지난달 29일 포스터 배포 중지와 폐기를 선언했다. 이해삼 본부장은 “신중한 검토 없이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한 포스터를 발행하게 된 점을 사과한다”고 밝혔다. 문제의 포스터는 당내 비정규직본부와 홍보실, 민주노총 공공연맹이 협의해 만들었다. 그러나 이 포스터는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 게시하기 위해 민주노동 공공연맹(지하철노조 등) 소속 노조와 함께 이름을 걸고 제작, 민주노총에 당의 폐기입장을 전달하긴 했지만 완전 폐기는 사실상 어려울 전망이어서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규직되면 결혼하자! 비난받을 만한 문구인가?” 사실상 이번 포스터 파문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민노당 내부에서 포스터 제작을 둘러싼 논란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99년에도 노동절 민주노총 포스터에 투쟁복장 차림의 남성을 배웅하는 여성의 모습을 배경으로 “당신만이 희망”이라는 문구를 넣어 성차별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는 노동자·농민·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을 표방한 민노당이기에,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의사소통 구조상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전향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규직되면 결혼하자!”는 포스터가 과연 비난받을 문구인가. 포스터 자체로 보면 “우리 정규직되면 결혼하자!”는 프로포즈를 남성이 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공감한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남성이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만으로 여성이 종속돼 있다고 보는 해석 역시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당 내부에서도 “노동운동 내에서 계속 되어온 남성중심의 관행이 포스터로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대중적인 포스터인만큼 별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나오는 등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진보진영 자체 내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남성 및 이성애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대중성 확보가 포스터 제작 취지인 만큼 대중의 의식과 궤를 갖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남성과 여성이 결합한 가족형태’가 보편적이므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민노당 홈페이지에 글을 남긴 당원 ‘비정규직이라 장가 못간다’는 “뭐가 성차별이란 말인가.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5년째 일하고 일하고 있는데, 정규직보다 연봉이 1천2백만원이 적다. 정규직되면 장가가려고 한다”며 “정말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포스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이런 차별을 받지 못했으니 나같은 비정규직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고 썼다. ‘역겹다’는 아이디의 당원은 “육체적 생존이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와 타인의 인정이 문제인 동성애자 문제가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다는 거냐”라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스스로 생명까지 끊어가는 분들을 위한 포스터에, 웬 난데없이 ‘성적취향’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을 들먹이느냐”고 꼬집었다. 반면 ‘RW’라고 밝힌 당원은 “차별받는 소수자를 위해 민노당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차별받는 것처럼 성소수자들도 차별받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정규직이 아니다”며 “개인의 의견을 떠나 당 차원에서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한 포스터를 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작 포스터 처리를 둘러싼 당내 수습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여성위원회와 성소수자위원회의 주장이 대세로 받아들여졌다. 이해삼 본부장은 “여성위원회와 여성정책위원회의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한 포스터 주장에 밀려 ‘문제가 없다’라는 의견은 묵살됐다”며 “포스터 내용 자체의 문제를 떠나 포스터 제작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배곤 부대변인도 “포스터 자체만으로는 남성이 프로포즈했다고 볼 수 없지만, 남성이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이 한 것 같은 뉘앙스를 느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진보주의자들 사이의 대중적 딜레마 드러난 것 논란에 대해 김권호 전남대 사회학과 강사는 “대중들의 정서는 일반적인 것(남성 비정규직이 가정을 먹여 살린다)에 익숙하고 대중화된 사고를 노리는 것이 홍보효과를 높일 수 있다”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을 표방안 민노당이 여성이나 성소수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자칭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미시 파시즘으로 규정한 뒤, “이번 일을 계기로 진보정당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가 강화되고, 여성과 성소수자 등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노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비정규직 포스터는 여성과 성소수자, 비정규직을 비하하고, 정규직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배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며 “포스터 제작과정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성과의 딜레마로 보고 있지는 않다.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수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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