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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일상의 소소한 상처, ‘소확혐’을 건너야 ‘소확행’ 만난다”

등록 2020-12-05 09:01수정 2020-12-05 14:08

[토요판] 인터뷰
<기억 안아주기> 낸 최연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과거의 두려움 피하려는 마음이
통증 등 다양한 신체적 장애로

현재의 기준으로 미래 예상 말고
있는 그대로 부딪쳐 실체 만나야
나쁜 기억 극복하고 치유도 가능

증상 아니라 환자에게 관심 갖고
함께 문제푸는 의료진 많아졌으면
최연호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아이가 보이는 모습이 걱정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기준과 시각으로 미래를 예상하면 안 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최연호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아이가 보이는 모습이 걱정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기준과 시각으로 미래를 예상하면 안 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취생몽사.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 등장하는, 마시면 기억을 지워주는 술이다. 술 한잔으로 아픈 기억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영화는 영화일 뿐. 일에 서투른 사회초년생 때 “이것밖에 못 하냐”고 질책한 상사는 몇년이 지나도 피하고 싶고, 내 아이가 편식을 하면 어렸을 때 입이 짧아 키가 작은 나를 닮을까 겁이 나 밥 먹어라, 영양제 먹어라 들들 볶게 된다. 현재를 엉크는 나쁜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등학교 1학년인 성필(가명)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이유 없는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가 더 많이 아팠고, 아침에 특히 통증이 심했다. 밥을 먹으면 배가 아플까 봐 잘 먹지도 않아, 한창 클 나이인데도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 질병이 있어서일까 걱정돼 위·대장 내시경 검사도 해봤지만 결과는 정상. 알고 보니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못 가 바지에 대변을 봐버렸는데, 심한 놀림을 당하고 이때 겪은 창피함이 너무 커 아침에 눈만 뜨면 배가 아팠던 것이다. 그 뒤 밥을 먹으면 학교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식사를 걸렀고, 나오지도 않는 대변을 보고 나가려다가 지각하는 일도 많았다.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이자 성균관대 의대 학장인 최연호 교수는 성필이 학교에서 겪은 경험을 ‘소확혐’, 즉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이라고 부른다. 나쁜 기억에서 시작된 두려움이 신체화 장애(신체 기능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다양한 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것)를 일으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물리적으로 심장에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몸은 뇌와 마음에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복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를 처방하고, 설사가 있다 하면 지사제를 주는 보통의 의사와 달리, 최 교수는 ‘기억’에 주목한다. 나쁜 기억이 기능성 증상의 뿌리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수천명의 아이들을 진료한 결과를 바탕으로 첫 책 <기억 안아주기: 소확혐,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을 썼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성균관대 의대 학장실에서 만난 최 교수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3년 전부터 했는데, 못 쓸 줄 알았다. 그런데 코로나19 덕분에 회의도 줄고 회식도 없어져서 4개월 만에 썼다”며 웃었다.

‘작은 트라우마’가 소확혐

‘뚝딱’ 써 내려간 책은 풍부한 임상 사례에 영화와 드라마, 한달에 최소 2권 이상 읽는다는 여러 장르의 책, 크고 작은 다양한 뉴스를 버무려 우리 모두가 겪는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을 설명한다. 정신과 의사도, 뇌과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닌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나쁜 기억이라는 문제를 들여다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을 진료하다 보니 10여년 전부터는 세상 이치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뭘 결정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와 미래는 없다.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면 편안하게 나아갈 수 있지만, 나쁜 기억이 많다면 현재에 방해가 된다. 내 과거가 지금의 나를 쥐고 흔드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환자를 보면서 느꼈다.”

소확혐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빗대 최 교수가 만든 단어다. 소확혐은 ‘작은 트라우마’다. 트라우마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질병을 불러올 정도의 큰 상처라면, 소확혐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상처라는 의미다. 다만 개인의 감수성, 각자가 놓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소확혐과 트라우마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소확혐이 신체 기능에 이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정도라면, 이건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되는 게 아닐까?

“정신분석학이 시작된 1900년대 초반과 달리, 요즘 정신과는 약물치료 중심이다. 환자가 왜 이런 마음을 갖게 됐는지, 왜 불안해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상담하는 게 아니라 화학적인 알고리즘에 따라 약을 처방한다. 내 환자들을 소아정신과로 안 보내고 직접 진료하는 건 그 때문이다. (부모 때문에 신체적 문제가 생긴 경우) 엄마, 아빠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엄마가 이랬냐, 아빠가 이랬냐 내가 물으면 아이들이 다 웃는다. 드디어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느끼는 거다. 부모한테도 아이를 다그치지 말고 믿어주라고 조언한 뒤 얼마 있다 보면 문제가 해결돼 있다. 그게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른다. 증상 자체가 아니라 환자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얘기해주고, 문제를 함께 풀어주는 의료진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의학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쓴 이유다.

하지만 대한민국 의사는 너무 바빠서, 세시간 기차 타고 두시간 대기해서 만난 의사가 허락해주는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이다.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묻고, 혈액이나 심전도 검사 결과지를 본 뒤 약 이름을 줄줄이 적은 처방전을 건네주면 끝이다. 최 교수가 책에서 언급한 화가 파울 클레의 말처럼 ‘관찰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환자가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과 전공자들이 대체로 환원주의자다. 현상 하나만 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엑스레이를 찍어서 장에 변이 보이면 변비라고 결론 내고 변비약을 처방해준다. 그런데 엑스레이는 (평면인) 2차원이다. (입체인) 3차원보다 단면적이 커도 부피는 작을 수 있다. 실제로는 변비가 아닌데,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하니 변비라고 할 수 있는 거다. 이건 오진이라기보다 한계다. 내가 학생들한테 늘 하는 얘기가, 의학지식만으로 환자를 보지 말라는 거다. 병을 알고 싶으면 환자가 왜 배 아프고 토하는지 부모 얘기,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희생 번트는 나쁜 기억 피하기

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증상만 따지는 의사의 과잉처방도 일종의 ‘소확혐 피하기’다. 생길지 안 생길지 모르는 손해를 걱정하고 이를 피하려는 ‘손실 기피’는 인간의 본능이다. 이에 따라 결과와 무관하게 무엇이든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게 ‘행동 편향’이다.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거나, 할까 말까 망설일 땐 하는 게 낫다는 말이 행동 편향을 쉽게 설명한 ‘격언’이다. 야구의 희생 번트도 전형적인 행동 편향 사례다. 통계적으로 희생 번트보다 강공의 득점 확률이 더 높지만, 무사 1루 상황에서 대부분의 감독은 번트를 선택한다. 여기서 점수를 내야 한다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대신 ‘번트 작전’이라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정상을 정상이라고 얘기해주는 게 제일 어렵다. 기능성 장애는 검사 결과가 당연히 정상으로 나오는데 환자는 아프다고 하니,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설명해줘야 한다. 그런데 검사 결과만 갖고 정상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결국, 며칠 푹 쉬면 낫는 감기에 항생제까지 처방하는 건 “돈 내고 진료받으러 왔는데 왜 안 고쳐주냐”는 비난을 피하려면 무엇이든 하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인 셈이다.

그 밖에도 소확혐을 피하려는 심리 기제는 편견, 혐오, 책임 전가, 집착과 강박 등 매우 다양하다. 13살인 민재(가명)는 여섯달 전부터 하루에 100차례 넘게 트림을 했다. 최 교수의 진료실에 함께 온 민재의 부모와 누나는 위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걱정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들이 민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재가 직접 말을 하도록 하자, 답이 나왔다. 입이 짧은 탓에 민재는 부모에게 먹는 것으로 계속 지적과 강요를 당했고, 다른 사안에서도 늘 의견을 무시당했다. 아예 시키는 대로만 생활하던 민재는 어느 날부터 불안할 때면 습관처럼 트림을 시작했는데, 이게 굳어져 하루에 100번 넘게 트림을 하고 참으려 하면 복통을 호소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자기 삶의 주도권이 없고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통제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민재의 마음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졌고, 몸은 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기 불구화’(실패나 잘못에 대비해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장애를 만드는 현상)를 일으킨 것이다.

“민재의 트림은 이제 나았지만, 가족들이 변하지 않으면 다른 방식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가족들이 자신들의 두려움을 피하려고 아이의 삶에 개입해 컨트롤하려 들면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게 민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주변 환경이 변해야 한다.” 학습된 무기력은 민재만의 것이 아니다. ‘헬리콥터 맘’으로 상징되는, 자식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설정하고 통제하는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 무슨 수업을 들을지, 세상에 나가 무슨 일을 하고 살지, 어떤 사람이 되어 누구를 만나며 살지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못한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직원들의 자율성을 짓누르는 곳에선 학습된 무기력이 만연해진다.

어릴 때 차만 타면 멀미로 고생했던 경험, 음식을 가려 먹다 혼난 경험은 대부분의 성인이 겪은 것이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했던 기억이 후각과 결부돼 버스 냄새만 맡으면 차가 움직이지 않아도 토했던 일, 맛도 식감도 모양도 이상한 걸 부모의 강제로 억지로 먹으려다 고역을 치렀던 일. 둘 다 소확혐이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다. “아이가 보이는 모습이 걱정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기준과 시각으로 미래를 예상하면 안 된다. 우리도 어렸을 때 파, 양파 안 먹었는데 지금은 잘 먹지 않나. 아이가 잘 안 먹어서 안 클까 봐 걱정하지만, 사춘기 지나면 다 먹고 잘 큰다. 나는 몇천명의 환자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진료실에 와 있는 아이는 이미 10년 전에 왔던 아이의 과거고, 10년 전에 와서 이미 커버린 아이는 지금 이 아이의 미래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거다.”

최연호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최연호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다들 그랬다, 믿고 기다려라

앞서 든 민재의 사례에서 보듯, 어른의 나쁜 기억과 두려움이 아이에게 전해져 ‘소확혐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이 악순환은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생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 때의 기억이 만든다. 소확혐 피하기가 아니라 극복과 치유를 얘기해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은 수면 내시경을 해도 잠이 안 드는 경우가 많아서 검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번은 10살이 채 안 된 환자가 수면 내시경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검사실 밖에서 이 소리를 들은 엄마가 병원에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나로선 작지만 나쁜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아이한테 수면 내시경이 필요할 땐, 수면이 잘 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호자한테 꼭 설명한다. 나쁜 기억이 좋은 경험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소확혐을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각하면서 부딪쳐보면 ‘좋은 나쁜 기억’이 될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과 있는 그대로 부딪쳐보란 말인가. “나쁜 기억을 만든 일이 벌어진 초기에 실체를 ‘자각’하고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정보가 유입돼 기억이 왜곡되고 집착이나 강박으로 변할 수 있다. 그 전에 일이 생겼을 때 주변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내 상태가 이런 거구나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감각과 그에 따른 감정, 마음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일으킨 기억과 마주하는 것이 자각이다. 자신에게 집중해주고 위안을 주는 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각의 과정을 거치면, 자신의 나쁜 기억이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혼자 어렵거나,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다면 전문가한테 심리치료를 받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소확행(행복)을 느끼려면 소확혐을 건너가야 한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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