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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코로나 전쟁’ 명지병원 이왕준, 사회적 책무가 곧 야망인 의사

등록 2020-04-11 09:04수정 2020-04-15 15:19

[토요판] 커버스토리
영원한 ‘청년의사’ 이왕준 이사장
민간병원이 코로나 대응 앞장선 까닭

코로나 확진자 감소 낙관 말아야
사회적 거리두기 풀리면 또 늘 것
최소 내년 봄까진 장기전 대비해야

우리나라는 예부터 의병의 나라
코로나 성과도 헌신적 공무원과
물불 안 가린 의료진 헌신 덕분

명지병원, 신종플루·메르스 맹활약
코로나 확진자 치료에도 최전선에
“내년 4~5월까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들쑥날쑥 튀어나오는 상황이 계속될 거다. 이런 ‘뉴노멀’ 상태를 이해하고,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 지난 7일 오후 경기 고양시 화정동 명지병원에서 가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내년 4~5월까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들쑥날쑥 튀어나오는 상황이 계속될 거다. 이런 ‘뉴노멀’ 상태를 이해하고,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 지난 7일 오후 경기 고양시 화정동 명지병원에서 가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명지병원은 독특하다. ‘환자 제일주의’ 기치 아래 숲속 같은 건강검진센터, 놀이공간 같은 유아응급실, 호텔 같은 정신건강의학과 등 공간을 혁신적으로 꾸며 놓았다. 일상적인 로비 음악회도 오래된 전통이다. 의료 비즈니스의 일환이지만, 명지병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민간병원이 꺼리는 감염병 대응이나 재난 및 응급의료 등 공공적인 부분에도 힘을 쏟아왔다. 특히 감염병과 관련해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때 맹활약한 데 이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적극적인 치료로 이목을 끌었다. 덕분에 병원에는 응원 편지와 메시지가 쏟아진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새 주인이 된 뒤 쌓인 성과다. 이 이사장은 의학계의 이단아다. 의대생으로서는 드문 학생운동가였으며, 인턴 시절에 개혁적인 의학전문지 <청년의사>를 창간했다. 개업이나 취업 경험도 없이 34살에 종합병원(인천사랑병원) 경영을 시작했다. 혁신 경영으로 주목받았고, 대형 규모의 명지병원까지 인수했다. 감염병 전쟁을 일선에서 이끌고 있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을 지난 7일 오후 병원에서 만났다.

“점심을 아직 못 먹었는데 어떡하죠. 잠깐 당 좀 보충하면 안 될까요?”

인터뷰 약속 시간인 오후 2시 명지병원 회의실에서 만난 이왕준(56) 이사장(호칭 생략)의 첫마디는 ‘아이구, 배고파’였다. 개혁적 의료 주간지인 <청년의사>가 만드는 인터넷 방송 ‘코로나 파이터스 라이브’(코파라)의 2시간짜리 생방송을 막 끝낸 상태였다. 2시간 정도로 약속받은 인터뷰 시간이 줄어들까 내심 걱정됐지만, 민생고를 외면할 수 없어 ‘드시면서 해도 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음압병실 등 코로나 전투 현장을 그의 안내로 둘러보느라 또다시 30분가량이 흘렀다. 마침내 이사장실에 도착한 그에게 작은 나무판에 담긴 점심이 나왔다. 밥을 담은 그릇과 컵라면 하나, 생수 한 병. 소박해 보여도 고급 음식이겠거니 했더니 예측이 빗나갔다. 인스턴트 컵밥을 데워 그릇에 쏟은 거였다.

―요즘 무척 바쁘겠다.

“바빠서 밥을 거를 때가 많다. 덕분에 체중도 많이 줄었다. 저녁은 약속이 없어 오히려 한가하다.”

―며칠째 국내 확진자가 50명 아래로 떨어졌다. 희망적으로 볼 수 있나?

“그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망자가 조금 줄었다고 좋아하는 것과 같다. 하하.”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늦은 점심으로 컵밥을 그릇에 쏟아 컵라면과 함께 먹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늦은 점심으로 컵밥을 그릇에 쏟아 컵라면과 함께 먹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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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키트는 소총 불과하나 유일한 무기

감염병 전문가답게 이왕준은 냉정했다. 그는 원래 외과 의사 출신이지만, 2009년 신종플루 때부터 감염병을 일선에서 다뤄왔다. 당시 신종플루가 터졌을 때 질병관리본부의 전문가위원회에 처음 참석한 뒤 매번 감염병이 돌 때마다 11년째 전문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대한병원협회에서도 신종플루 상황실장(2009년), 메르스 대책위원장(2015년)에 이어 신종 코로나 비상대응실무단장(2020년)을 맡고 있다.

―100명 안팎으로 유지되다가 더 줄었으니 코로나 발생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그건 사회적 거리두기의 결과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금 느슨해지면 또 늘어날 수 있다. 이게 워낙 전세계에 유행하는 팬데믹이어서 그렇다. 우리나라 안에서 열심히 막아도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1년간 국경을 완전히 봉쇄하고 살 수는 없지 않나. 세계가 적어도 4월까지는 계속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중국 우한이나 우리나라 대구의 코로나 그래픽을 보면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해서 정점을 찍고 대략 정리되는 데까지 5~6주가 걸린다. 그걸 미국에 대비해 보면 뉴욕은 아마 부활절쯤 정점을 찍을 것 같다. 유럽도 대략 4월 말이 되어야 기세가 수그러들어 5월 초쯤 되면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될 것이다. 그 이후에도 잔잔한 여진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도 4월20일까지 거리두기 하면 지금처럼 어느 정도 잠잠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 감염은 물고기가 저수지에서 튀듯이 여기저기서 몇백명씩 집단감염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상태가 뉴노멀인가?

“그렇다. 잔잔하게 가다가 가끔씩 퐁퐁 튀는 상태가 최소 지금부터 1년은 더, 그러니까 백신이 나올 것으로 보이는 내년 초중반까지는 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두번째 팬데믹 물결이 이번 가을이나 겨울에 올 수 있다. 스페인 독감에서 보듯 첫해보다는 다음해가 더 독하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더 강하게 변신한 놈이 다시 한번 창궐하게 되면 올해 면역이 생긴 사람도 또다시 감염될 수 있다. 사람들이 메르스 경험을 자꾸 상기하는데 그건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때가 단기전이었다면 이건 장기전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전체 인구의 60% 이상에 항체가 생겨야 끝나는 세계적 질병이다. 스페인 독감이나 페스트, 천연두와 같은 문명사적 상황이다. 백신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오후 코로나19 환자가 치료받고 있는 이 병원 중환자실(음압격리병동) 앞에서 간호사와 얘기하고 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오후 코로나19 환자가 치료받고 있는 이 병원 중환자실(음압격리병동) 앞에서 간호사와 얘기하고 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뉴노멀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대책이 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채택한 전략을 그대로 갖고 가야 한다. 중국식은 강제로 모든 것을 중지시키는 셧다운이었다. 전체주의적 통제 방식이다. 다른 나라는 초반에 안일하게 집단면역 운운했다가 뒤늦게 난리가 났다. 일본은 뭉개는 방식으로 갔는데 저는 일본이 심각해질 거라고 본다. 우리는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코로나가 시작됐는데 일본과 대조적으로 열심히 잔불을 꺼가면서 하나하나 잡아내는 식으로 했다. 민주주의적 패러다임을 존중하면서 국경이나 지역 봉쇄 없이 최대한 열어놓고 코로나를 잡는 거였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는 진단키트를 일찍 개발해 광범위하게 진단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확진자를 찾아내서 격리, 치료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진단키트가 비록 소총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이 소총을 많이 보급해서 한 발 한 발 많이 쏘는 쪽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바이러스 차단 정책을 하면서도 일정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생활방역이다. 완화정책을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인지는 탄력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약간 풀어줬다가 또 아웃브레이크가 오면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는 식이다. 싱가포르도 다시 2주간 올스톱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이해해야 한다. 병원 등 의료기관은 감염병 진료체계와 일반환자 진료시스템을 완전히 분리해서 투트랙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는 “정부와 방역당국이 애썼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를 정부가 자화자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물불 안 가리고 밤낮없이 일한 의료인과 전폭적으로 협조한 국민들의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처럼 24시간 일하고, 대구에 자원봉사 하러 가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다른 나라 같으면 태안반도에 기름 유출이 됐으면 그냥 포기하지 사람들이 자원봉사 가서 수건으로 기름을 닦아내겠나.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의병의 나라다. 위기가 닥치면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보다 강력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힘을 발휘한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위기상황에서 계속 이렇게 될 걸로 생각하면서 평상시에 준비할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오후 경기 고양시 화정동 명지병원 안 국가지정 음압격리병동에서 간호사와 코로나19로 입원한 환자를 모니터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7일 오후 경기 고양시 화정동 명지병원 안 국가지정 음압격리병동에서 간호사와 코로나19로 입원한 환자를 모니터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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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1년 전부터 대비 훈련

명지병원은 감염병에 대비해 국가가 지정한 음압격리 병상을 운영하는 전국 29개 병원 중 하나다. 지난 1월20일 국내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다음날 명지병원은 코로나 대응 상황실을 설치했다. 국내 병원 가운데는 처음이었다. 1월26일 명지병원에서 첫 확진자(3번 환자)가 나왔다. 3번 환자의 퇴원(2월12일)을 시작으로 이날(4월7일)까지 명지병원에서 치료받은 코로나 환자 18명이 완치됐으며, 중증환자 9명은 여전히 치료 중이다. 명지병원은 공공의료에 관한 법률이 2012년 만들어진 직후부터 공공의료사업단을 만들었다. 민간병원으로서는 최초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13년에 경기 북부권역 응급센터로 지정받았으며, 같은 해 국가지정 격리병상 운영 병원이 됐다. 또 재난의료분야에서도 경기도 거점 병원이다.

―민간병원이면서 감염병 등 공공적인 부분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사회적 책무성 때문이다. 공공이건 민간이건 헬스케어 비즈니스, 즉 의료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무성이라고 본다. 사회적 책무성은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경쟁력이기도 하다. 장비나 인적자원 등 의료자본적 요소만 갖고 가면 절름발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했지만, 저는 그 부분을 늘 염두에 둬왔다.”

명지병원은 이왕준이 인수한 직후인 2009년 신종플루가 발생했을 때도 활약했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단 한 건의 2차 감염 없이 메르스 환자 5명을 완치시켰다. 1년 전부터 병원에서 메르스 대비 훈련을 한 결과였다.

―1년 전부터 메르스 대비를 할 생각을 어떻게 했나?

“중동에서 메르스가 발병한 뒤 질병관리본부에서 열린 전문가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메르스의 특성에 대해 알았다. 공항에서 가까운 우리 병원에도 틀림없이 메르스 환자가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돌아와서 직원들한테 그랬다. ‘첫번째는 아니더라도 두번째나 세번째 순위로는 우리 병원에 메르스 환자가 찾아오게 돼 있다. 독성이 강한 놈이니까 미리 훈련하자’고 했다.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벗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세세하게 훈련했다. 역시 연습이 중요하더라. 메르스를 겪은 뒤에 병원에 아예 감염병 대응팀과 재난 대응팀을 상설로 만들었다. 매년 가을과 봄에 한차례씩 감염병과 재난 대응 훈련을 하고 있다. 메르스 때 실수한 것은 소통 분야였다. 치료는 잘했지만, 병원 구성원과 입원 환자들에게 알리지 못해 퇴원 사태가 속출하는 등 파장이 컸다. 그 교훈으로 이번에 코로나 3번째 확진자가 나왔을 때는 언론 보도 이전에 병원 직원들과 입원 환자들에게 즉각 알렸다. 다행히 그런 소통 덕분인지 입원 환자는 한 명도 나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외래 환자는 처음에 약 30% 정도 줄었다가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환자수의 변화와 관계없이 확진자 치료 보도가 나간 뒤에 오히려 시민들의 격려 편지가 쏟아졌다. 보람을 느낀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2009년 신종플루 때 병원 의료진과 함께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명지병원 제공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2009년 신종플루 때 병원 의료진과 함께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명지병원 제공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2월12일 완치돼 퇴원하는 코로나19 환자(17번)와 포옹하고 있다. 명지병원 제공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지난 2월12일 완치돼 퇴원하는 코로나19 환자(17번)와 포옹하고 있다. 명지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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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가 고래를 먹은 명지병원 인수

이왕준은 고된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1997년 마침내 외과 전문의가 됐다. 작은 한 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가기로 얘기가 됐지만, 그해에 국제통화기금(IMF) 부도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평범할 수 있었던 한 외과 의사의 인생 행로를 크게 바꿔놓았다. 한번도 개업하거나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진료를 해본 경험이 없는 그가 종합병원을 경영하게 된 것이다. 진로그룹이 무너지면서 인천 주안역 앞의 계열사인 세광병원도 부도가 났고, 1998년 이왕준은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이 병원(인천사랑병원으로 이름 바꿈)을 인수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병원 경영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종합병원장이 첫 직업이 됐다.

“아이엠에프 사태 때문에 갑자기 이뤄진 일이긴 하지만, 병원을 직접 운영해봤으면 하는 생각은 사실 그 전부터 있었다. 의대를 졸업한 1992년에 의학 전문지인 <청년의사>를 친구들과 창간해 만들 때부터 그런 꿈을 키웠다. 의료 현장의 여러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청년의사>에서 많이 다뤘는데, 그때 선배 의사들이 하는 얘기가 하나같이 ‘너희도 나와서 직접 해봐라,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는 거였다. 주의 주장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우리가 생각하고 구상한 것이 세상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실제로 한번 보여주자, 의료문화를 바꾸려면 그런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운 좋게 기회가 왔던 거다. 잃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 친구들과 함께 덤벼들었다.”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인천사랑병원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세가지를 내걸었다. 첫째는 지역주민 병원의 새 모델, 둘째는 의료문화 개혁의 실험장, 세번째는 꿈의 공동체였다. 병원 직원의 조직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꾸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여러 실험들을 했다.”

이왕준과 청년의사들은 환자와 지역주민을 위한 각종 문화행사(음악회, 시 낭송회 등)와 건강 관련 강좌를 개원 초부터 열었다. 그들이 꾼 꿈은 ‘길과 집’이라는 병원가(노랫말 노혜경, 곡 이건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지금 명지병원 계열 의료기관 구성원 전체가 부른다.

“바람 거센 고단한 길 위에 우리가 집 하나 지어놓으면 새들이 와서 살아주겠지. 모래처럼 팍팍한 이 세상 우리가 일구어 꽃밭을 만들면 벌레들 와서 살아주겠지. (중략) 이 세상 온갖 근심과 걱정을 우리가 모두 짐질 수는 없지만, 병든 서러움 서러운 아픔 없게 하리라.”(길과 집)

이왕준은 인천사랑병원을 연 뒤 100일 동안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응급실 당직을 자청했다. 병원 청소노동자와 같은 월급(80만원)을 받았지만, 우수한 의료진을 영입하고 최신 의료장비도 들여왔다. 덕분에 병원에 환자가 몰리면서 3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4년째에 발생한 노조 쟁의도 해결돼 병원 운영이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갔지만, 그는 11년 만인 2009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명지대학교 계열의 명지병원을 인수했다. 200병상 정도의 중소병원이 600병상 규모의 대학병원급을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이 나돌았다.

―명지병원을 인수하는 것은 모험 아니었나?

“모험이지만, 제대로 살림살이와 판을 키우고 싶었다. 신약 개발에 비유하자면 동물실험까지는 완성했는데 정말 사람한테 사용하려면 임상시험을 해봐야 할 거 아니냐는 심정이었다. 그런 갑갑함이 있었는데 명지병원이 매물로 나왔다. 우리랑 얘기를 하다가 모 대기업이 끼어드는 바람에 밀려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가 2008년이었는데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그 대기업이 명지병원 인수를 접었고, 다시 저한테 연락이 왔다. 그때 속으로 ‘파랑새가 이제 손바닥에 앉으려고 하는구나, 앉기만 해봐라, 내가 잡아서 절대 안 놓는다’고 다짐했다. 하하. 저는 자신이 있었는데 우리 자문 변호사는 잘못하면 계약금 겸 1차 지불금 100억원을 다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수 있다면서 인수를 말렸을 정도로 큰 도전이었다.”

이왕준은 인수 6개월 만인 그해 말 중도금 140억원을 다 갚았다. 전체 이사 8명 가운데 6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쥐면서 대형병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됐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지난 7일 &lt;한겨레&gt; 인터뷰에서 “사회적 책무성은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경쟁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지난 7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사회적 책무성은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경쟁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기도 고양시의 명지병원은 공간 혁신의 선두주자다. 건강검진센터가 있는 숲마루 모습.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기도 고양시의 명지병원은 공간 혁신의 선두주자다. 건강검진센터가 있는 숲마루 모습. 고양/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학생운동 출신의 외과 전문의
인턴 때부터 의료문화 개혁운동
30대 때 종합병원 경영자 길에
2009년 명지병원 인수 새 도전

병원 공간 혁신과 공공성 확충
응급실·감염병·재난대응 역점
“사회적 책무는 병원 존재 이유”

“새로운 것 만든 혁신가로 남으려
숱한 정치 입문 제의 다 거절해”

“헬스케어 서비스의 미래적 모델
완성작으로 만들고픈 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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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제일주의의 역발상

―조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이 뭐였나?

“사람이다. 의료서비스 자체가 사람이 직접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의존성이 다른 직종에 비해 훨씬 크다. 사람 중에서는 결국 의료진이 핵심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사람들이 와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뜻이 맞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뜻이 맞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로 채워야 한다. 최고의 의료진을 대거 스카우트해 왔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일일이 대화해서 비전을 설명하고 변화를 촉구했다. 사람들이 변화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는 데서 시작했다. 그다음에 전략을 짰다.”

―어떤 전략이었나?

“명지병원의 경우는 당시 동네병원으로서도 좀 후졌다. 왜 명지병원에 오는지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97%가 가까워서였지 이 병원이 잘해서라거나 좋아서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면 이것을 강점으로 삼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동네분들이 우리를 믿고 오게 하려면 그 출발을 무엇에서부터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데 그게 바로 응급실이었다. 이건희 회장도 한남동에서 쓰러졌을 때 가까운 순천향병원을 가지 않았나. 이웃 사람들이 급해서 가까운 병원에 가봤더니 괜찮더라, 잘하더라고 하는 데서부터 신뢰가 생긴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돈 안 되는 응급의료를 어떻게 병원의 경쟁 상품으로 하겠다는 것이냐며 듣보잡 경영이라고 하더라. 하하.”

명지병원은 이때부터 소아응급실을 들이는 등 응급의료에 올인했다. 응급환자를 수송하는 119구급차가 불편해하는 사항을 다 뜯어고쳤으며, 응급실 당직자의 호출에는 모든 의료진이 20분 안에 무조건 응하도록 만들었다. 이사장인 이왕준 자신이 처음 몇년 동안은 명절날 응급실 당직을 거의 도맡는 등 사실상 응급실장 역을 했다. 과감한 투자와 노력으로 경기도 북부권역의 응급의료센터, 감염병과 재난의료의 거점병원으로 성장했다. 또 ‘환자제일주의’를 내걸어 인수 초기부터 환자·방문자 친화적인 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건강검진센터를 숲처럼, 정신과 병동을 최고급 리조트처럼, 또 항암 주사실을 아늑한 휴게실처럼 꾸몄다. 음압병실도 평시에는 중환자실로 변형되는 스마트 중환자실로 만들었다. 또 전체 규모에서도 명지병원은 제천 명지병원까지 합해 종합병원 3곳(1600병상)에 요양병원 하나, 요양원 둘을 거느린 병원 그룹이 됐다.

―병원을 혁신하고 키우게 된 원동력이 있다면?

“아버지와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병원(내과)을 운영하느라 일요일 하루만 빼고 종일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는 모습이 어릴 때는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커서는 직업으로서의 의사직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깨달았다. 다만 그걸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더라. 어떻게 하면 의사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 유의미한 사회적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대학생 때 매진했던 학생운동에서는 사회적 책무의 중요성과 함께, 실패의 경험에서 오히려 많이 배운 것 같다. 즉, 세상은 일순간 바뀌는 것이 아니고 사회제도적으로 쌓여야 사람들의 행동과 패턴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속가능하고 선순환적인 과정으로 병원 모델을 만들고 그게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게 내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학 9년 만인 1989년 서울대 의대 졸업식날 부모님과 함께 선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이왕준 제공
입학 9년 만인 1989년 서울대 의대 졸업식날 부모님과 함께 선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이왕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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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실용주의자

전주의 개업 의사 집안에서 자란 이왕준은 198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80년 광주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높아가던 때였다. 학력고사 전북지역 수석을 한 모범생에 바이올린 연주가 수준급일 정도로 부잣집 아들답게 청소년 시절을 우아하게 보냈지만, 대학생 이왕준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6년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인 ‘구학련’(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김종민 민주당 의원 등이 학생운동 시절 친구들이며, 의대 동기인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과도 가깝게 지낸 사이다.

―당시 의대생 가운데 학생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고교 때 전주에서 고전을 읽는 연합 독서클럽에서 활동했지만 사회의식은 거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아침에 등교할 때 짭새(사복경찰을 부르는 은어)하고 같이 등교하고, 그들이 캠퍼스에 상주해 있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미팅 등 낭만도 즐기는 1학년 생활을 하다 보니까 바로 운동권에 갈 수가 없어서 야학을 몇개월 동안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위선적인 일로 여겨졌다. 이 세상과 전면전을 못 하니까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걸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거다. 또 노동자 학생들도 공부를 위해서 야학에 나오기보다는 대학생들을 동경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더라. 그래서 어느 날 교사회의 할 때 ‘이 위선자들아, 어떻게 이런 위선적인 일을 2년, 3년씩 할 수 있냐’고 외치고 나왔다. 그 뒤 혼자 홍도로 2박3일 여행을 다녀와서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운동권에 들어가서는 미친 듯이 했다.”

―래디컬한 성격이었나 보다.

“래디컬하긴 했는데 그때도 사실 나는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였다. 관념적으로만 떠들거나 실체가 없는, 또는 궤변에 대해서는 준엄한 편이었다. 대신 제가 한 기획이나 구호는 다 성공했고 실제적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제가 기획했던 게 ‘전두환 이순자 체포결사대’, ‘국토순례대행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등이었다. 하하.”

―정치권의 유혹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어느 정당에서 무조건 전략공천을 주겠다고 제안받은 게 보궐선거 한번까지 포함해서 그동안 모두 네번이었다. 매번 거절했더니 4년 전부터는 그런 얘기를 안 하더라.”

―사회제도를 바꾸려면 정치를 하는 게 빠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거절했나?

“정치를 해도 사회가 안 바뀔 것 같았다. 사회를 바꾸는 데에 정치가 매개자 노릇을 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걸 만들 수는 없다. 혁신을 한다는 건 새로운 걸 만드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역사가 진보하고 문명이 개선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는 정치가 아니라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이사장이 추구하는 새로운 건 뭔가? 의료계의 혁신인가?

“새로운 의료체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료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바이오 비즈니스 기반으로 연구·개발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뒤늦게 이런 새로운 연구 바람이 들려고 20대 때 내가 공부를 안 했나 보다 싶다. 하하.”

이왕준은 지난해 3월 의료 연구기업인 ‘캔서롭’을 인수했다. 유전체 분석과 분자진단, 면역치료제 개발 등 의학과 관련한 신기술을 추구하는 회사다. 코로나19가 터진 뒤에 자체적인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이 키트는 얼마 전 유럽 인증을 받은 데 이어 미국 식품의약국의 사용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1998년 인천사랑병원을 개원하던 날 의료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왕준 제공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1998년 인천사랑병원을 개원하던 날 의료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왕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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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살기 목표로 공부에 늦바람”

―앞으로 목표는 뭔가?

“병원사업 관련해서도 제가 욕심이 있다. 완성작을 만들어보고 싶다. 지금까지 인큐베이팅 했던 내용들을 모아서 좀더 미래의 의료와 우리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병원이자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미래에는 지금처럼 병원에 환자들이 오는 것을 넘어서 지역사회를 헬스케어 네트워크로 엮어야 한다. 홈케어와 병원 치료의 경계선이 없을 정도로 전 주기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는 새로운 헬스케어 서비스의 미래적 모델을 만들고 싶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명지병원 협력기관인 인도의 아폴로 병원, 미국의 메이오 클리닉 같은 병원을 만들고 싶다. 그러한 최고가 되려면 그만한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게 바이오 연구(R&D)라고 생각한다. 그런 필살기를 가져야 한다.”

―의료인으로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

“새로운 걸 만들고 그걸 통해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전파하고 쉬지 않고 노력하는 혁신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면 개인적으로도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열변에 인터뷰가 4시간 반 이상 계속되면서 저녁 시간이 됐다. 주문하지도 시키지도 않았지만, 병원 근처 햄버거 가게의 치킨버거 두 개와 탄산음료 두 캔이 인터뷰 탁자 위에 올라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햄버거를 우걱우걱 뜯어먹으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컵밥 점심과 햄버거 저녁이 아주 자연스러운 사람이었지만, ‘필살기’와 ‘완성작’을 얘기할 때 이왕준의 눈은 ‘청년의사’처럼 반짝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인터뷰를 위해 음압병실에서 이사장실로 오는 길에 얼핏 들었던 그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여태까지는 망가진 것을 고쳐 사용했지만, 이제는 900병상짜리 새로운 것을 하나 더 하고 싶다.”

고양/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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