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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발로 뛸 수 없는 기자, 난 오늘도 걷는다

등록 2013-08-30 19:48수정 2013-09-03 14:13

23일 오후 김지석 <한겨레> 논설위원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9층 옥상에서 8층 논설위원실로 내려가고 있다.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어깨와 팔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듯 팔목이 떨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3일 오후 김지석 <한겨레> 논설위원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9층 옥상에서 8층 논설위원실로 내려가고 있다.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어깨와 팔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듯 팔목이 떨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몸]
나의 몸 <8> 언론인 김지석의 다리
▶ 신체 장애인은 몸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체의 손상을 이유로 좌절하지 않으려고 비장애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삽니다. 집중력과 몸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릅니다. 신체적·정신적 손상이 사회적 억압 상태로 연결되지 않는 세상을 기다립니다. 지체장애인이자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인 김지석씨에게 ‘다리’에 대해 물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것은 우주의 무게다.

사람이 느끼는 자존감의 무게를 환산할 수 있다면 아마 두 다리의 무게만큼일 것이다. 선다는 것은 세상에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몸통 아래 붙어 몸을 받치며 서거나 걷거나 뛰는 일을 만드는 부분’인 다리는 그렇게 지금, 여기 실재하는 나에 대한 깨달음을 선물한다.

언론인 김지석(55)의 다리도 그렇다. 그가 서 있던 공간을 소개하면 그의 다리가 움직인 궤적이 그려진다. 1984년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신문>에 입사해 사회부, 제2사회부(지역부), 국제부 등에서 근무했다. 1988년 <한겨레>로 옮겨와 그해 5월 창간에 참여했다. 경찰서와 교육부 출입을 거친 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부에 있었다. 이후 여론매체부장, 교육공동체부장, 편집기획부장, 국제부장을 지내고 2003년 이후 논설위원으로 외교, 안보, 통일, 국제 분야를 담당해왔다.

눈밝은 독자들은 이미 알겠지만, <한겨레> ‘김지석 칼럼’에 실리는 얼굴의 언론인이 맞다. 신문사에서 보는 김 논설위원의 오른쪽 바짓단은 항상 무릎 부분에서 접혀 있다. 두 개의 알루미늄 지팡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는 오른쪽 다리 대퇴부를 절단한 장애인이다.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싫다고 도망가는 딸을 잡을 수 없더라

사고가 일어난 때는 1989년 5월14일의 늦은 밤이었다. 교육부를 출입하던 젊은 기자 시절이었다. 퇴근길 서울 목동의 오목교 근처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승용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았다. 지나던 경찰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두 다리의 출혈이 심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사고 전후 일주일가량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택적 기억상실을 겪었다. 그가 담담하게 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절단 수술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최대한 살리려다 안됐지. 조금씩 잘랐어요. 처음에는 무릎 아래로 잘랐죠. 그게 한 일주일째였나? 그런데 계속 썩어가니까 무릎 위까지 자르고 더 자르고…. 수술실에 50~60번은 들어갔던 것 같아요. 다리 수술만 두달 정도 걸렸죠.”

무릎이 있고 없고는 매우 중요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는 종아리뼈 없이 태어났지만 무릎 아래로만 의족을 하고 런던올림픽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 2012년 한서대학교 대학원 재활과학과 석사논문 ‘하지절단 부위 및 원인과 균형 자신감 간 관계 분석’을 보면 무릎 아래 절단 군에 비해 무릎 위 절단 군의 균형 자신감이 낮다. 하퇴절단군(무릎 아래 절단) 157명이 63.04점의 자신감을 보였다. 이와 비교해 대퇴절단군(무릎 위 절단) 83명은 51.55점이었다. 다리의 기능이 걷는 것뿐 아니라 몸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3일 오후 김지석 <한겨레> 논설위원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사설을 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23일 오후 김지석 <한겨레> 논설위원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사설을 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차가 난간을 들이받았다
두 다리의 출혈이 심했다
계속 썩어가니 자르고 더 자르고…
오른쪽 다리가 15㎝만 남았다  

때때로 칼로 내리치듯 아픈
환상통이 밀려와 괴롭지만
의족 벗고 다리를 받아들인 뒤
산으로 지하철로 계단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정형외과 유재두 교수는 무릎 위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가 더 일상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무릎 아래를 절단한 경우 무릎관절을 구부리게 하는 근육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무릎 위를 절단하면 다리 뒤쪽 근육까지 약해져서 굳는다. 결국 다리 전체를 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의족 착용이나 다리를 쓰는 데 어려움을 더 많이 겪는다는 설명이다.

고통은 의지보다 한 발 빨랐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강박과 한 발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왼쪽 다리도 무릎 아래 신경이 끊어져 50%의 기능밖에 하지 못했다. 매일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마음이었다. 고통으로부터 거리두기는 힘들었다.

“수술 후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나 스스로 내 다리가 불안하니까. 모든 건물에서 주차장이 제일 미끄러운 것 알아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넘어져봤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병원 생활만 19개월. 그중 3개월간의 재활은 ‘새로 태어나는’ 시간이었다. 일어나기, 걷기, 계단 오르기, 비탈길 오르기 등 순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새로 익혔다. 사라진 신체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무의식(제육감)이 의식으로 자주 표출됐다. 한 다리가 없다고 의식하기 전에 오른쪽 다리가 먼저 움직였고 그때마다 넘어져야 했다. 그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넘어지자 늘 긴장하고 살아야 했다. 곧 익숙해지고 실수는 줄었지만 대신 활동반경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호방한 성격은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 딸이 세 돌이었어요. 집에서 보이지 않던 아빠란 사람이 나타나니 애가 놀라잖아. 친해지려고 놀아주려고 하는데 자꾸 싫다고 도망갔어요. 그런데 걔를 내가 따라가 잡을 수 있어야지….”

발로 뛸 수 없는 기자, 공부를 시작하다

수술 뒤 그의 오른쪽 다리 길이는 15㎝ 정도로 짧아졌다. 힘을 다 받아내지 못하는 왼쪽 다리로만 서 있어야 하는 일상이 항상 도전이었다. 한 다리로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다. 다리의 부재는 이동권을 뺏어갔다. 흔히 언론인에게 냉철한 이성과 날카로운 필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발로 뛰는 능력도 필요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심신의 고통이고 생활의 불편함이었다. 동시에 불이익이 뒤따랐다.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기자 역시 ‘기회의 제약’과 마주쳐야 했다. 그는 국제 분야, 외교안보 분야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기자는 발로 뛰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현장에 가야 감성을 획득할 수 있거든요. 그걸 할 수 없는 나는 자료를 축적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만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공부한 거죠.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떨어질 것 같은 막막함과 허무함을 단지 생각만으로 극복하기 힘들어요.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해서 이겨내려고 했어요.”

머리와 손의 확장이 다리의 부재를 극복하도록 도왔을까. 2006년 그는 수술 뒤부터 줄곧 착용해온 의족을 벗기로 결심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회사에서 의족을 차고 생활하는 것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구부러지는 무릎의 기능까지 장착한 의족은 무게가 3㎏이 넘었다. 남은 다리가 짧았기 때문에 허리에 끈을 매 버텨보았지만 항상 허리가 아팠다. 업무시간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렇게 살다가는 오래 살지 못하겠다는 절박함이 깨달음을 불렀다.

“의족은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어요. (내 다리가) 추하잖아요. 남들이 나를 보면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마음에 남들 보기 좋으라고 했던 건데, 의족 때문에 나는 정작 많이 아팠어요. 받아들인 거지요. 자기가 자기 몸을 미워하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절단 수술 직후에 그랬듯이, 내가 내 다리를 만져주고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냈지요.”

슬픔, 노여움, 괴로움 등 몸에 달라붙어 있던 짐들을 덜어내기로 했다. 등산을 시작했다. 주말 이틀 동안 처음에는 하루 4시간씩, 나중에는 6시간씩 운동시간을 정해두고 등산을 하거나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체력관리를 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 대신 어깨에 체중이 실렸다. 때론 어깨를 뽑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이러다 병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반복하다 보니 힘든 순간은 지나갔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무릎이 아픈 대신 어깨와 (지팡이를 받치는) 팔목이 아플 뿐이라고. 그의 블로그에는 ‘장애인 등산기’ 폴더가 따로 있다. 134건의 글이 쓰여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계곡을 따라 계단 길이 만들어져 있다. 경사가 제법 된다. 속도를 일정하게 해서 꾸준히 올라간다.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게 좋다. 그래야 중력이 작용해 어깨에 부담이 덜 간다.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일행 가운데 여성들이 뒤쪽으로 처진다. 계단에서는 대개 내가 아줌마들보다 좀 빠르다. 팔과 다리가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힘에서는 다리가 낫지만 재충전 시간에서는 팔이 빠르다는 것이다. 팔 근육과 어깨는 1~2분만 쉬면 회복이 된다. 그만큼 에너지 공급 속도가 빠르다는 뜻일 것이다.”(2011년 12월30일의 글, ‘청량산, 꼭 가봐야 할 산’ 중에서)

김 논설위원은 “현재 몸상태가 사고 이후 최고”라고 소개했다. 지팡이의 높낮이도 조금씩 조절했다. 지금은 가장 높은 칸에 고정하고 이용한다. 팔과 어깨에 무리가 많이 가는 자세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걷는다.

몸이 건강해진 참에 그동안 제한했던 자신의 공간을 점차 늘려가는 중이다. 보통 장애인용 차량을 이용하지만 일주일에 절반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신문사 건물 8층에 있는 논설위원실에 오고 갈 때도 일부러 계단을 이용하며 운동한다. 동료들은 그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비장애인보다 섬세하고 여리다. 등산을 가지 못하는 평일에 비장애인보다 운동량이 부족해 변비가 심한 편이다. 올해 초 항문연축으로 수술을 받았다. 허리가 아프거나 컨디션이 나빠지지 않게 세심히 관리해야 하는 몸이다.

“다리는 내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이 수족들 중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배어나오는 그 환상통/ (중략)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김신용의 시 ‘환상통’ 중에서)

사고 후 24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아프다. 때때로 환상통이 거울처럼 나타나 그의 몸을 비춘다. 절단장애인들 대부분이 환상통을 겪는데 소아절단, 선천성 절단에서는 드물게 나타나고 김 논설위원처럼 절단연령이 높을수록 많이 나타난다.

어떤 아픔일까. 그는 아픔의 단계를 수면욕구를 기준으로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잠을 전혀 잘 수 없는 상태를 6단계, 새벽에야 겨우 잠드는 5단계,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4단계, 비몽사몽 잠을 자는 3단계, 개운하지 않게 자면 2단계, 고통 없이 잔다를 1단계로 구분한다면 현재 그의 환상통은 2단계까지 나아진 상태다.

“수술 후에는 발가락 끝부터 아파. 4~5단계 되는 아픔이에요. 우리들은 그걸 ‘신경이 말린다’고 표현해요. 지금은 환상통이 허벅지까지 올라왔어요. 많이 좋아졌는데 한달에 한두번은 4~5단계 환상통이 올 때가 있어요. 칼로 내리치듯 엄청 아파. 번개 치는 어떤 날에 보니 번개랑 동시에 다리에 번개가 내리쳐요. 착착.”

밤시간 잠든 때 주로 아프고 습도가 높거나 추우면 더 심하게 아팠다. 비장애인들이 겪는 신경통이랑 같은 걸까. 해가 지날수록 통증이 나아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다 아팠어요. 몸이 하나의 유기체구나라고 느꼈어요. 나에게 몸을 잘 느끼게 해준 계기가 이 다리인 셈이지요. 근데 다리를 보니 다른 기관과 다른 게 있어요. 다리는 몸통 전체랑 연결돼 있잖아요. 다리에 따라 공간이 달라지면 내 마음도 달라지고….”

지체장애 2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그는 언론인으로서 남다른 위치에 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에 가장 예민하게, 그리고 힘있게 목소리를 낸다.

“장애인이 된 후 정서적인 면이 많이 발달한다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우리가 비장애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불편한 시간이 길고 짧고의 차이지 누구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꾸면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다리는 내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이기도 합니다.”

두 다리로 땅을 지친다. 그 힘으로 몸이 공기를 밀고 앞으로 나아간다. 삶을 헤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다리가 닮았다. 자존감을 잃고 과거에 머물러 있던 시절의 그에게 오른쪽 다리는 없었다. 그때의 고통을 상기시켜주는 환상통이 거울처럼 자신의 하나뿐인 다리를 비추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어깨와 팔로, 또 왼쪽 다리로 걷는 지금은 오른쪽 다리의 부재를 예전만큼 아프게 인식하지 않는다.

오늘도 김 논설위원은 신문사 계단을 세 칸씩 오르내리며 세상을 향해 펜을 든다. 다른 선후배 동료들과 똑같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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