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심장혈관외과 중환자실에서 레지던트 정선민, 신유림, 유우식(왼쪽부터)씨가 최우리 기자와 함께 수술 후 회복중인 소아환자를 지켜보고 있다.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중환자실에 출입할 때는 실내화를 갈아신고 모자와 가운을 착용해야 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레지던트와 표준근로계약서
4주 평균 80시간 근무 등 담은
레지던트·인턴 수련환경 개선안
선포식 무산되면서 물거품
항상 피곤한 미숙련 의사의 진료
환자에게 엄청난 고통 줄 수도 정맥 주사를 척수에 잘못 주사했다. 9살 종현이는 열흘 뒤 숨졌다. 2010년 5월 대구 경북대학교 부속병원을 찾은 정종현(당시 9살)군의 죽음은 레지던트 1년차 의사의 부주의로 주사가 뒤바뀌면서 일어난 ‘의료사고’였다. 3년이 지난 지금, 환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보건의료 인력의 근무환경을 개선시켜 의료질을 개선하자는 내용의 환자안전법(일명 ‘종현이법’) 제정 움직임이 활발하다. 환자들은 레지던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레지던트는 ‘항상 피곤을 달고 사는 숙련되지 않은 의사’라고 폄하되는 게 현실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 보호자들이 연합회로 들고 오는 피해 제보 건 가운데 가장 많은 게 레지던트와 연관된 것”이라며 “중환자 보호자들은 레지던트가 누구냐에 따라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숙련도가 덜한 의사의 진료는 환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근무시간만 보면 레지던트의 노동환경은 산업화 시대보다 가혹하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2010년 전국의 전공의 942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42.2%가 주당 100시간 이상 근무했고 주당 80~100시간 근무자도 26.2%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전공의의 67%는 휴일에 상시 출근해 임의당직을 서고 있었다. 울산대학교 의대 예방의학과 이상일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국내 환자안전관리보고서’에서 의료진의 과오로 연간 4만명이 의료사고로 숨지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불가항력적인 사고를 제외하고 예방가능한 사망은 1만7000명이라는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2011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6316명, 자살자 수는 1만5906명이다. 레지던트의 수련·노동환경 개선 요구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최근에야 논란이 되는 걸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정형준 정책국장은 달라진 전문의의 지위를 이유로 들었다. “과거에는 힘들게 전공의 수련 마치고 전문의가 되면 다 개원해서 원장이 됐다. 예비 원장의 마음으로 고된 수련환경을 버틸 수 있었는데, 시대가 변하고 의사 수가 늘고 개원 환경은 나빠지면서, 수련환경 개선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비약적 결론일 수 있지만, 가장 힘들게 일하는 간호사의 근무환경처럼 전공의들의 근무환경도 바뀔 수 있다.” 전공의노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도 달라진 의사의 지위를 말했다. “의사는 더이상 기득권층이 아니다. 전문가일 뿐이다. 망해서 자살하는 의사, 환자에게 얻어 맞는 의사도 있다.” 수련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3월 전공의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각 의료단체가 함께 추진하려던 ‘전공의 수련환경개선 선포식’이 무산됐다. 대한병원협회(병협)는 보건복지부와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와 함께 만든 ‘전공의 수련환경 모니터링 평가단’에서 논의한 개선 내용을 명문화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대전협이 병협에서 거부했다는 이유로 선포식에 불참한다고 밝혀 선포식은 무산됐다. 이 단체들은 △주당 최대 수련시간(4주 평균 80시간, 교육적 목적 위해 8시간 연장 가능) △최대 연속 근로시간(36시간 초과 금지, 응급상황시 40시간까지 가능) △당직일수(주 3일 초과 금지) △휴가(연가 14일) 등을 논의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보건복지부도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의지는 없어 보인다.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관계자는 “수련환경이 좋지 않은 병원들은 전공의들이 가지 않아 자연도태 될 것”이라며 병원의 자율적 개선이 먼저이고 정부가 나서 특별한 대책을 세울 뜻은 없음을 내비쳤다. 병원협회는 5월30일 선포식이 무산된 이유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전공의협의회에서 선언문에 ‘강제, 규제, 감시’라는 문구를 추가할 것을 요구해왔다. ‘실천적 실행방안 마련’으로 문구를 수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전공의협의회가 거절했다”고 밝혔다. 레지던트 근로조건 개선의 핵심 쟁점은 근로시간, 당직일수 등을 명문화한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여부’다. 레지던트에게 수련환경은 곧 노동환경이다. 전공의협의회는 ‘피교육자’이자 ‘계약직 노동자’인 레지던트의 이중적 지위를 들어 일부 병원이 근로계약서 작성을 기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는 레지던트도 노동자이기 때문에 근로계약서 없이 레지던트를 고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의 근로개선정책과 관계자는 “노동과 학습을 같이 하긴 하지만 그것은 시간별로 따져볼 문제이지, 근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긴 어렵다. 병원이 레지던트의 근로자성을 알면서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실태 점검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아직 일부 중대형 병원은 근로계약서 작성을 기피하는데도 노동부는 이에 대해 실태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근로계약서 작성은 고용주의 의무사항으로 이를 어길 경우 500만원 벌금에 처해진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감독관 인력의 한계상 대형병원 등은 문제가 있을 때만 점검을 해왔다. 액수가 적고 신속하게 부과되지 못하는 벌금 등 제도적 문제점의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지던트의 수련·노동환경은 의료서비스의 질과 직결된다. 개인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젊은 의사들은 수련·노동환경이 좋은 전공과 지역으로 가길 희망한다. 그 결과 ‘쏠림현상’이 나타난다. 전공별로는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 등 응급상황이 적고 연구나 개인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과로 전공의들이 몰리는 추세다.
흉부외과는 힘든 업무 때문에 의사가 항상 태부족이다. 교수와 전공의 등 팀을 이뤄 수술하는 특수성이 있는데, 새로 들어오는 전공의 수가 정원의 50%를 밑돌아 수술 인력을 채우지 못하거나 진료보조 인력을 고용하는 병원도 있다. 전문간호사가 전공의 대신 수술을 돕는 식이다.
전공의들의 수도권 쏠림현상은 지방과 수도권의 의료 격차를 보여주는 지표기도 하다. 레지던트의 50% 이상이 서울에서 수련중이며, 수도권으로 확대하면 62.5%에 이른다. 지방의 한 거점병원에서 일하는 직업환경의학과 4년차 레지던트인 이아무개씨는 “지방병원에서는 1차진료가 가능한 가정의학과 전공의 위주로 뽑는데, 급할 때는 병원이 외과나 내과계 다양한 전공으로도 돌려쓴다. 전문의가 되려면 병원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환자단체 역시 레지던트의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줄이는 게 환자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레지던트들이 졸린 눈으로 돌아다니고 피곤해하면 환자들은 두려울 뿐이다. 병원은 값싼 노동력 때문에 수련의를 이용하고 있다. 지금 병원은 환자 중심이 아니라 병원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레지던트를 획기적으로 늘려서 제대로 교육·실습받게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레지던트를 없애고 경험 있는 전문의로만 진료·시술하게 하는 게 환자들의 솔직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인기 학과와 수도권으로 전공이 쏠리는 현상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뚜렷한 대책은 없다. 의료정책개선과 관계자는 “전공의 수와 의과대학 졸업생 수를 같게 유지하도록 전공의 정원을 책정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형준 인의협 정책국장은 먼저 대형병원이 전문의를 많이 고용해 의료서비스의 질과 전공의의 수련·노동환경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공공의료시스템의 적정화에 대한 고민 없이 의료를 시장에만 맡겨두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고생 끝에 전문의를 취득해봤자 동네에서 감기나 고혈압 같은 1차진료를 본다. 모든 의대생을 전문의 과정으로 이끌겠다는 속셈은 대형병원이 전문의를 고용하지 않고 (비교적 싼 노동력인) 전공의 수급을 원활하게 해 의료인력을 수급하겠다는 의미다. 대형병원에서 전문의를 많이 늘리면 전문의 중심으로 진료나 당직을 서고, 자연스럽게 수련환경 개선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지금 의료인력 개편을 잘못하고 있다.”
최우리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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