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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존중받는 경험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든다

등록 2023-05-20 08:00수정 2023-05-20 10:00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정서적 방임’의 결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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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철(가명)씨는 20대 남성으로 지방에서 대학을 휴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현재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등록금을 벌면 다시 학교를 다닐 계획입니다. 배달이 많아서 바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해 생활비도 아끼고 있었고 식사도 편의점에서 해결했습니다.

어느 날 영철씨가 음식 배달을 완료했는데 배달받은 집에서 음식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전액 환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다시 찾아가서 분명히 배달이 됐다고 설명하자 심하게 화를 내면서 영철씨의 부모님을 무시하는 막말을 했습니다. 영철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화가 났지만 결국 대응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환불을 해줘야 했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폭언을 한 그에게 분노가 일었지만, 나중에는 그때 화도 제대로 못 내고 고개를 떨구던 자신이 한없이 싫어졌습니다. 영철씨는 ‘내가 빠져나갈 길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무섭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부모 불화와 죄책감

영철씨의 부모님은 영철씨가 어릴 때 거의 매일 싸웠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주로 돈 문제였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가게를 했지만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막내 영철씨를 포함한 삼남매를 키우느라 돈이 부족하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영철씨가 초등학생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인 영철씨만 데려갔고 재혼하게 되면서 영철씨는 새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새아버지는 사업이 잘되어 경제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외도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다툼이 많았습니다. 결국 영철씨의 어머니는 다시 이혼을 했고 그 뒤로 영철씨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영철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는 ‘부모님이 나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 이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꼭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영철씨는 무능하고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일었고, 환불을 요구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욕을 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영철씨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극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했습니다. 영철씨는 우울증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상담을 통해 영철씨는 한번도 존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막내가 태어나서 집안이 힘들어졌다’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영철씨는 오직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어야 존중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새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올 때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분명히 배달했는데 부당하게 돈을 빼앗긴 그날,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할지 방향을 잃게 됐습니다.

‘존중받는 경험’은 사회적 선물

우울증에 걸리면 마치 터널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한 방향으로만 치닫게 됩니다. 심각하게 우울해지면 예전의 우울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상됩니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정서적 방임’이 현재의 기억과 연관되어 감정의 증폭이 이뤄집니다. ‘정서적 방임’이란, 아동에게 필요한 애정 표현과 정서적 지지 없이 무관심으로 방치해 결핍을 남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신체적 학대에 비해 직접적인 폭력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서적 방임의 영향은 매우 크고 성인기에 우울증이 일어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철씨는 치료를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울증 치료 후에는 과도한 두려움이 줄어들어 다시 일을 시작하고 학교에도 복귀했습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존감이 생기면서 세상 살기 힘들다는 느낌도 줄었습니다. 영철씨의 어머니는 자식 걱정은 많이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고 존중해주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뒤늦게라도 아들과 대화하며 어린 시절 형성된 그의 슬픈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서적 방임을 경험한 청년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이 있어도 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교우관계를 통해 감정의 결핍이 채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의 팬데믹 상황에서 대인관계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사회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서적 방임’을 경험한 이런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존중’입니다. 예를 들어 영철씨가 음식을 배달한 뒤 “식지 않게 금방 배달해주셔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됐네요.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함을 표현한 사람이 많았다면 영철씨는 결핍의 기억을 메워나갔을 겁니다. 폭언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존댓말과 반말이 있습니다. 반말은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존댓말을 쓰고, 내 돈 주고 서비스를 제공받았어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해봅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경험’을 준다면, 그건 그들이 자신을 좋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동시에 내가 존중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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