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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씨는 60살 중소기업 대표로 지난 30년간 식자재를 만드는 업체를 운영했습니다. 회사가 잘되어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대학 졸업 뒤 호식씨의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어 일에 대한 부담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호식씨는 회사에서 회의 중에 갑자기 가슴 왼쪽 심장이 심하게 뛰면서 두근거리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쉬고 나자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고 그 뒤 인근 대학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습니다. 호식씨는 심장내과에서 진찰 후에 24시간 홀터 심전도(하루 동안 심전도 기록계를 몸에 부착하고 생활하면서 일상생활 중 심장의 상태를 확인하는 검사)를 찍었는데 ‘심방세동’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정맥 질환의 일종인 심방세동은 심방에서 발생하는 맥이 정상을 벗어나 빠르고 불규칙한 맥박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호식씨는 심장내과에서 약물치료를 받게 됐고 좋아하던 술·담배도 이참에 끊었습니다. 그 뒤 호식씨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이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심방세동 질환이 있다는 걸 금세 잊어버리고 약도 불규칙하게 복용하며 병원 외래진료도 찾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호식씨는 가족들과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 중턱을 오르다 갑자기 심하게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쓰러진 호식씨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며 119에 신고했습니다. 심장 정지가 발생했을 때 흉부를 압박하는 심폐소생술을 심정지 뒤 1분 이내에 시행하면 생존율을 2~3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옆에 함께 있던 아들이 그가 쓰러지자마자 즉시 심폐소생술을 한 덕분에 호식씨는 뇌나 심장의 후유증 없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심정지가 오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날 산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내려오면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호식아, 호식아….” 천국에서 자신을 부르는 신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하늘에서 어렴풋하게 오렌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호식씨는 그에게 “제발 용서해주세요. 제 죄를 용서해주세요. 제발, 제발이요”라며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날부터 호식씨는 자신이 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며 회사가 아닌 종교단체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확인한 결과, 호식씨가 빠진 그곳은 사이비 종교단체였습니다.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호식씨를 말렸지만 가족들에게 “나는 천국을 보았고 오렌지색 옷을 입은 신에게 회개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며 회사까지 처분하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호식씨를 설득해 인근 정신건강의원에 데려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호식씨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우울증이 심해져 망상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망상이란 사실과 다른 그릇된 믿음을 확신하는 상태로, 호식씨의 경우 자신이 심정지 상태에서 경험한 일을 종교적 신비 체험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심장의 기능이 정지하면 뇌로 가는 피가 부족해져서 혈중 산소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저하돼 저산소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뇌가 저산소증 상태가 되면 이상감각·환청·환시 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우울증이 발생하면 이때의 경험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뇌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호식씨는 뇌졸중이나 뇌 손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경인지기능 검사상 단기기억력의 저하와 전두엽 기능 저하가 나타났습니다. 뇌 기능이 저하되면 우울증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호식씨는 의사의 설명과 치료 후에 자신이 심정지 때 경험한 것들이 뇌의 저산소증으로 인해 당시 상황을 왜곡되게 인식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도 이전보다 많이 회복되었고, 심장내과에서 처방한 심방세동 약도 잘 복용하고 규칙적으로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의 절반은 없어졌지만 나머지는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았다는 신, 즉 ‘오렌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심정지 상태에서 본인이 목격한 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에선 호식씨의 벌을 단죄하기 위해 내려온 신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가 본 오렌지색 옷은 정신을 잃은 호식씨를 구하려고 출동한 119 구조대원의 복장이었습니다. 구조대원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신의 음성으로 왜곡해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호식씨처럼 뇌 기능 저하로 의식과 지남력(날짜·장소·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문제가 생기는 질환을 ‘섬망’이라고 합니다. 섬망 증상으로는 주의력·언어력 저하 등 인지기능 전반의 장애와 환각·초조함·떨림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섬망은 다양한 원인으로 갑자기 발생하지만 심장 질환이나 큰 뼈의 골절, 전신마취 수술을 통해서도 흔히 발생합니다. 섬망 상태에서는 연상 작용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과 어렴풋하게 파악한 정보를 연관해 해석하기 쉽습니다. 두려움이 심한 경우엔 섬망에서 회복되고 나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친한 지인이나 권위 있는 사람이 이를 부추기면 이 믿음은 더욱 강화됩니다. 두려움에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결정하기 전에 가족과 꼭 상의하고 전문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두려움이 만드는 환상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