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언제 와요. 지금 오면 안 돼요?”
재훈(가명)의 방문 요청에 마음이 흔들렸다. 찾아가 뵐 때가 되어서 나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재훈이네 방문을 미뤄두고 있었다. 올해 열아홉살로 직업학교에 다니는 재훈은 만성질환, 정신질환 등 복합질환으로 투병 중이다. 당뇨, 정신질환이 있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재훈과 엄마인 미연(가명)씨는 번갈아 전화해서 나에게 와달라고 부탁한다. 2년 전 복지관 의뢰로 한달에 한번씩 찾아뵙고 있지만 건강 개선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집이었다.
“아픈 게 내 탓이냐고”
갑자기 오라고 전화를 하면서도 현재는 외출 중이라 저녁 6시30분 이후에 방문 가능하다고 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또 미룰까 고민이 되었다. 며칠 전 재훈이네가 이사를 가서 집들이가 더 늦어지면 안 될 거 같아 가볍게 인사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아주 먼 거리는 아닌데 그동안 가던 집이 아닌 처음 가는 곳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도 복잡했다. 오래된 빌라 4층에 올라 집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없다. 키우던 강아지만 반응을 하고 짖는다. 옆집에 피해 갈까 싶어 복도에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전화를 해보니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엄마인 미연씨가 먼저 왔다.
“어젯밤에 응급실 갔다가 오늘도 병원에 가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밥 먹느라 늦었어요.”
미연씨는 나를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제가 생겨 재훈이 어젯밤 응급실에 간 것이었다.
“(아들이) 자살충동이 있어서 자해를 시도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응급실에 갔다 왔어요. 오늘 또 진료받고 왔어요.”
또 15분쯤 지나니 재훈이 온다. 대학병원 정신과에 다니고 있는 재훈은 증상 조절이 쉽지 않다. 모자는 집 근처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려는 차에 재훈이 화장실에 갔고, 그사이 미연씨는 택시를 타고 와버렸다. 재훈은 걸어오느라 더 늦었다. 웃으며 안부를 묻던 것도 잠시, 엄마와 아들의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네가 화장실에서 안 나와서 선생님 기다리시니까 택시 타고 온 거야. 너만 아픈 거 아니야. 나도 아파. 아파서 못 걸어. 너 때문에 어젯밤에 잠도 못 잤어.”
“아픈 게 내 탓이냐고.”
미연씨는 고도비만에 조절되지 않은 당뇨병이 있고 고관절, 무릎 통증이 심하다. 어디서 지린내가 난다 했더니 어젯밤 재훈이 소변을 이불에 본 냄새였다. 나를 앞에 두고 무섭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나와 꽤 친해졌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위기 상황이 오면 드는 생각들
나는 여기에 왜 오는 걸까. 의사로서 전혀 도움을 주지도 못하지만 찾아갔을 때 너무 반가워해주는 가족과 강아지를 생각하면 발길을 멈추기 어렵다. 두분은 아플 때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닌다. 병원과 약에 의존하지 않고 참을 수 있을 땐 참고 꼭 필요할 때 필요한 약을 먹도록 지속적으로 말씀드렸다. 여기저기서 받은 약을 함께 보면서 먹지 말아야 할 것과 꼭 먹어야 할 것들을 알려드렸다. 하지만 워낙 건강상태가 나빠 급할 땐 응급실에 가야만 했다. 웃으며 일상을 얘기할 때가 많지만 위기 상황을 마주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하는 수 없이 싸우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지내라며 선생님 같은 훈계를 늘어놓고 나온다.
이미 늦은 시간 무거운 마음에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종종 찾았던 영화관이 보여 들어갔다. 마침 <코다>라는 영화가 상영 예정이었다. 마스크가 두개 필요하다는 검색사이트 영화평이 허언이 아니었다. 눈물과 콧물이 넘쳐흘러 마스크가 두개 이상 필요한 영화였다. 의료인으로 마스크 여분을 항상 챙겨 다니는 나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영화관에는 나 혼자였다.
코다는 청각장애가 있는 농인 부모와 함께 사는 청력 손실이 없는 청인 자녀를 의미하는 말이다. 청인 딸 ‘루비’는 가족의 어업 일을 도우면서 노래를 한다. 그런데 루비의 노래는 가족에겐 들리지 않는다. 가족은 루비가 어업을 돕기를 기대하지만, 루비 역시 노래에 대한 꿈과 재능을 포기하기 어렵다. 가족과 루비는 갈등한다. 영화 후반부 루비의 학교 공연을 보는 부모와 오빠의 시선에서는 그저 웃으며 입만 열고 닫는 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대학 입시 오디션을 하는 공연장 2층 좌석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확인한 루비는 음성언어와 수어로 함께 노래한다.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함께 그린다.
그럼에도 발길 멈추기 어려운 가족
농인과 청인이라는 부모-자녀 사이의 다름이 재훈, 미연씨 모자와 겹쳐 느껴졌다. 영화에서처럼 조금씩 이해해가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화를 다 보고 나의 세상은 얼마나 편협한지 자문해보았다. 재훈, 미연씨 모자의 삶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삶을 어디까지 엿봐도 될까? 때때로 울고 싶은 좌절감으로 남의 집을 드나들지만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힘든 삶에도 우리를 붙드는 힘이라고 영화를 통해 다시 떠올린다. 영화 덕분에 위로를 받았지만 재훈, 미연씨네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전히 무겁다. 임상 효능이 검증된 디지털 치료제가 개발되면 나 같은 뚜벅이 의사는 필요 없는 걸까? 그럴지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우리를 아파도 견디게 할 것이다. 들릴 듯 말 듯 한 희미한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마음의 귀를 열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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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원 찾아가는 의사 _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