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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주치의제는 풀뿌리 의료…장애인 등 당사자 참여 꼭 필요”

등록 2020-10-08 10:42수정 2020-11-11 08:49

주치의제 도입 범국민운동본부 온라인 세미나
장애인 건강 주치의 제도의 개선 방향 등 논의
“공급자 중심에서 환자 중심의 지불제도로 바꾸고
의료·보건·복지가 통합된 건강관리 체계 마련을”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협의 구조 마련도 시급
#1 중증 지적장애인 박아무개(23)씨에게 세상은 위험한 것 투성이다. 길을 걷다 자전거나 자동차를 마주할 때면 공포감에 호흡이 가빠진다. 8개월 전엔 뇌전증 발작을 겪으면서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발뒤꿈치엔 욕창이 생겨 밖에 나가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그런 박씨 집에 방문한 주치의는 욕창 치료는 물론이고, 집에서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방문 운동처방사를 연결해줬다.

#2 15년 전 뇌출혈로 몸 한쪽이 마비된 백아무개(76)씨는 중환자실처럼 꾸며진 방에서 일상을 보낸다. 그에게 물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병원 가는 길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4층에 거주해 나가는 일이 어려울 뿐더러, 1회당 20만원가량의 출동비가 드는 사설 129 차량을 부르는 것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주치의가 왕진을 통해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진행하고, 영양상태를 체크한다. 최근엔 그에게 당뇨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8개월 전 뇌전증 발작으로 걷지 못하게 된 박아무개씨 집에 운동처방사가 방문해 근력 운동법을 가르치고 있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8개월 전 뇌전증 발작으로 걷지 못하게 된 박아무개씨 집에 운동처방사가 방문해 근력 운동법을 가르치고 있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이처럼 의사가 병원에 가기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생활 습관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병을 치료하고, 의료 외에도 필요한 보건 및 복지 서비스를 연결해줄 수 있으면 어떨까? 그저 치료 대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삶 속에 들어가 아픈 이유를 살펴본다면, 환자에게 필요한 게 단순히 약 처방이 아니라 운동이나 좋은 습관의 형성, 식단 조절과 같은 처방일 수 있다.

최근 장애인·노인 건강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고령화(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 2019년 기준 15.5%)와 장애 인구의 노령화(등록 장애인 261만명 중 65살 이상 비율, 2019년 기준 48.3%)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지역 중심·생활 밀착형 의료 기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17년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건강권법)을 제정해 장애인의 건강관리를 보장하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의료 접근성을 가질 권리를 명시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 건강보건관리종합계획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하고, 재활 운동 및 체육, 장애인 건강 주치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 중 ‘장애인 건강 주치의제’는 중증장애인이 거주 지역에서 장애인 건강 주치의로 등록한 의사를 선택해 건강 상태를 지속해서 관리받는 것으로, 2018년 5월 1차 시범사업 시행에 이어 지난해 12월부터 2차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9일 대한가정의학회와 소비자단체 등 96개 단체가 참여한 ‘주치의제 도입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우리 사회에서의 주치의 제도 경험과 국민 주치의 제도의 시사점’이라는 온라인 세미나를 열었다. 현재 시범사업으로 운영 중인 장애인 건강 주치의 제도의 경험과 개선 방향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발제자로 참여한 홍승권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누구나 필요할 때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의료 기본권’을 강조하면서, “지역 기반 일차의료인 주치의제 활성화로 장애인과 노인의 의료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서비스 수요와 견줘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장애인 주치의 시범사업 현황’ 자료를 보면, 2019년 기준 전국 228곳의 의료기관이 장애인 주치의제 사업에 참여했고, 577명이 교육을 이수해 316명이 주치의로 등록했으나, 실제 활동 중인 사람은 87명에 불과했다. 수요자이자 토론자로 세미나에 참여한 이찬우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사무총장도 “지역에서 장애인 주치의를 찾고 싶어도 서비스 공급 기관을 찾을 수 없다. 물리적 접근부터 어려운 게 장애인 주치의제의 장벽”이라고 꼬집었다.

시범사업에 참여 중인 정명관 정가정의원 원장은 토론에서 “현재 장애인 주치의제는 진료 시간만큼 소요되는 서류 및 청구 업무로 의사에겐 행정 부담이, 환자에겐 본인부담금이 높아져 비용 부담이 되는 구조”라며 “행정 업무의 간소화와 환자의 부담 비율을 낮추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종한 인하대 의대 교수는 “서비스 항목별로 수가를 청구하는 공급자 중심의 방식에서 소비자들이 교육, 상담, 방문 진료를 통합해서 이용할 수 있는 지불제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기관별 등록 장애인 수와 이들의 질병 개선 정도를 평가해 추후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도 서비스 공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지역에서 의료, 보건, 복지가 통합된 건강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은 통합 조정자로서의 장애인 건강 주치의 역할을 강조했다. 서울시 은평구에서 마을 주치의로 활동하는 그는 “주치의는 지역에 있는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환자를 위해 어떤 지역 자원을 활용할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추혜인 원장은 은평구 내 보건소, 복지관, 시민단체 등 11개 기관이 참여하는 재활협의체 활동을 하면서, 의료 외에도 다양한 돌봄과 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환자를 위해 여러 기관을 연결해주고 있다.

2019년 4월 기준 서울시 은평구 재활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는 기관은 총 11개다. 각 기관은 환자들의 의료, 돌봄, 복지 욕구를 파악하고 서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2019년 4월 기준 서울시 은평구 재활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는 기관은 총 11개다. 각 기관은 환자들의 의료, 돌봄, 복지 욕구를 파악하고 서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날 세미나 참석자들은 장애인 건강 주치의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관련해,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는 협의 구조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홍승권 교수는 “주치의제는 전문가 중심 제도가 아니라 환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풀뿌리 건강 의제”라고 했고, 임종한 교수도 “지방정부와 장애인단체가 지역의 장애인 미충족 의료를 조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혜인 원장은 주치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의 주인인 주민들이 스스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구성해본다면, 수요자 중심의 주치의제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주치의제 도입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오는 15일 2차 온라인 세미나를 연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주치의제를 만들어 간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사례를 공유하고, 주치의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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