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 현금인출기 ‘공포’
혼자선 이용 불가능…도우미가 중간에 가로채기도
1급 시각장애인 강아무개(46)씨에게는 ‘인출용’으로 쓰는 빈 통장이 하나 있다. 폰뱅킹을 이용해 ‘예금용’ 통장에서 ‘인출용’ 통장으로 뽑을 액수만큼만 송금한 다음 복지회관에서 나온 도우미와 함께 현금입출금기를 찾는다. 그래야 통장(인출용)의 비밀번호가 알려져도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침술원을 하는 시각장애인 김아무개(37)씨는 그날 번 돈을 밤에 현금입출금기에 입금할 때 건물 경비원 도움을 받는다. 가끔 세어 놓은 액수와 입금액이 1만원 정도 차이가 난다. 이럴 때는 자신이 돈을 잘못 센 탓인지 아닌지 몰라 찜찜하다.
현재의 현금입출금기로는 비밀번호 입력 등 기기 조작이 어려워 시각장애인들의 불만이 크다. 최근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기기가 늘면서, 이들에게 돈을 입금하고 뽑는 일은 더욱 힘들어졌다. 기기에 붙은 버튼을 누르는 방식일 때는 일부 시각장애인들은 손가락 감각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할 수 있었다.
터치스크린 방식에서 나오는 “화면을 누르라”는 식의 음성안내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하나 마나 한 것이다. 현재의 현금입출금기를 쓰지 못하거나 사용하기 불편한 시각장애인은 1~4급 5만여명에 이른다.
지난달 강원도 춘천에서는 시각장애인의 현금카드를 훔쳐 210만원을 빼내 가로챈 3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알고 지내던 그 시각장애인의 돈 찾는 일을 도와주면서 비밀번호를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계좌 잔액과 통장 비밀번호 등의 노출에 따른 불안감과 사생활 침해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각장애인들은 숫자 버튼이 있는 리모컨 설치나 은행 점포의 장애인 별도 안내, 돋보기 설치 등의 대책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몇 대의 현금입출금기 중 한 대는 시각장애인이 불편 없이 쓸 수 있는 것을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경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개발원 원장은 “점포당 한 기기라도 시각장애인이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비장애인도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용 부담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규정을 통해 이를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장애인 접근성’ 보장의 일환으로 법규 마련이나 제품 개발을 통해 장애인들이 현금인출기 등의 기기를 불편 없이 쓰게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신창현 단국대 강사(특수교육학)는 “인터넷뱅킹도 잘 활용하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유용하겠지만, 음성 지원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인터넷뱅킹 홈페이지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본영 기자, 음성원 인턴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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