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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장애인이 거리를 바꾼다

등록 2010-04-21 14:42

서울거리의 ‘턱’ 을 없애주시오

1984년 9월 19일. 서울 강동구 마천동 주민이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었던 김순석(지체장애1급, 당시 34세)씨가 자신의 지하셋방에서 음독자살하면서 서울 시장에게 남긴 다섯장 짜리 유서의 일부분이다.

"서울거리의 턱을 없애주시오. 건너갈 수 없는 횡단보도. 들어갈 수 없는 식당과 화장실. 우리가 살 땅은 어디입니까...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습니다. 시장님.".

부산 태생인 김씨는 결혼 8년차인 부인과 슬하에 5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으며 셋방 옆에 딸린 작업장에서 머리핀, 브로치 등의 악세사리를 만들어 남대문 시장 등지에 납품하며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삶을 살았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에서 만든 악세사리를 납품하고, 수금을 하기 위해 시내 나들이를 할 때마다 그는 거리의 턱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기 2개월 전에는 작업을 위해 공구를 빌리러 성수동으로 나섰다가 교통순시원에게 걸려 이튿날 새벽까지 붙잡혀있는 일도 있었다. 이유는 무단횡단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해서 건널 수 있는 경사로를 찾다보니 불가피하게 차도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발견한 교통순시원에게 붙잡혀 무단횡단으로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장애인이 거리를 바꾼다

김순석씨라는 한 장애인의 죽음은 비록 동정어린 시각이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라도 일부 신문지면을 통해 대서특필되었으며 장애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게 만드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0년. 장애인이 시민의 이름으로 직접 거리를 바꾸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인권포럼(대표 이범재)이 < 이 거리를 바꾸자 (약칭 이.거.바.)>라는 거리환경조성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디자인연구소(소장 김대호), 열린사회시민연합(대표 주영남) 등의 시민단체들이 함께 연대하여 진행되고 있는 이 운동은, 쾌적한 거리 환경 조성을 원하는 시민들이 <이.거.바(http:;/www.fixmystreet.kr)>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직접적인 제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처리 과정에서는 관공서와 연계하여 거리 환경을 개선해 나가는 민관협치(governance)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용하기 편리한 거리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을 기준으로 모두136 (하루 평균 2.6)건의 불편 사례가 접수되었으며, 이중에서 85 (62.5%)건이 해결되었다. 관공서로부터 처리 약속을 받은 "처리중" 사례가 거의 100% 해결되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약 100여건이 해결된 셈이다. 서울 거리의 턱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겪었던 김순석씨가 음독자살한지 26년만의 일이다.

보편적으로 설계된 거리를 희망한다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란 연령, 성별, 장애 등과 관련없이 누구나 사용하기에 편리한 제품 혹은 건축 설계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설계된 거리란 비장애인이나 장애인, 여성이나 남성, 어린이나 노인 등의 모든 사람들이 다니기에 편리한 거리 설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는 지하철역사를 생각해보자. 지상에서부터 지하철이 도착하는 지하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면, 이 역사는 휠체어를 이용해야만 하는 지체장애인, 노약자,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아이 엄마, 여행때문에 캐리어를 끌고가야 하는 사람, 그리고 여타의 이유로 짐을 날라야 하는 사람 등,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 그 유리문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의 모습이 로고로 찍혀있다. 마치 휠체어 장애인만 사용해야 하는 시설처럼 느껴진다. 엘리베이터 없이 휠체어 리프트만 설치된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마치 구경거리처럼 촌스러운 배경음악에 맞추어, 역사 직원의 도움으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여행을 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가야 하는 사람이나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리프트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본인이 사용할 설치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휠체어 장애인들 조차 이런 역을 기피한다. 차라리 멀리 돌아가더라도 다른 역을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이 역사에 또 다시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건축의 초기부터 보편적 설계를 고려하는 것은 낭비를 막고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구조를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설계는 도시 디자인 혹은 제품 디자인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적용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 필요성에 대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용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낮다. 그리고 이것은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장애인에게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유모차를 끌고가야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의 불편을 일으킨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제공하는 2008년 통계에 따르면 장애인의 58% 는 60대 이상의 노인이다. 그리고 등록장애인의 90% 이상은 선천적인 이유가 아니라, 후천적인 사고와 손상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늙으면 장애인이 되는 것이고, 살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 있는 문제로부터 그 누구도 나는 예외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거리의 문턱과 휠체어용 리프트 앞에서 분노한다.

당신도 이 문제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부디 김순석씨의 눈물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땅의 420만 장애인들이 그 보편적 설계때문에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도 그 피눈물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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