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어린이를 치료하고 있는 허영진 원장.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24)장애어린이 치료에 삶을 건 허영진 푸르메한방재활센터 원장
(24)장애어린이 치료에 삶을 건 허영진 푸르메한방재활센터 원장
늦겨울 바람은 매서웠다. 수 천 명의 마라토너와 함께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가슴을 쭉 펴고 겨울 바람을 정면으로 받았다. 출발선에 선 순간에도 마음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차가운 바람을 깊이 들이마셨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한 번도 마라톤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내가 완주한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도 목발을 짚고?
1999년 2월이었다. 나는 동아마라톤에 참가했다. 주위에서 말린 사람들의 말 그대로 ‘무모한 짓’이 틀림없었다. 나는 목발에 의지해 걷는 지체장애인이고, 마라톤은 비장애인에게도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종목이 아닌가. 마라톤을 뛰겠다는 결심을 한 뒤 3개월 정도 러닝머신 위에서 하루 4시간씩 걸었던 게 준비라면 준비였을 뿐, 페이스 조절과 같은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상태였다. 내 머리 속에는 42.195km를 완주한다는 단순한 목표밖에 없었다.
극한의 도전을 통해 새 삶의 길을 찾다
지금 돌아봐도 내겐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무모한 짓을 통해서라도 나는 나 스스로를 시험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제대로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통과의례! 고통스런 의식을 통해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통과의례로 나는 마라톤을 선택했다. 한의대를 졸업한 뒤 판사가 되겠다고 사법고시 준비에 뛰어든 지 4년, 아무 성과도 없이 내 앞에는 30대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내가 서른이 된 그 해는 아버지가 환갑을 맞으신 해였다. 한의대 졸업, 법대 편입으로 가방끈만 길어진 실업자 아들은 부모님 얼굴을 뵐 낯이 없었다. 그 부모님이 어떤 부모님인가. 생후 9개월째 경기를 앓고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들이 아닌가.
부모님은 “괜찮다, 네가 하고 싶다면 끝까지 고시에 도전해라”하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이미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한의사 가운을 다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그 길로 가야 한다면 뭔가를 증명하고, 돌아가는 이유를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다. 출발 신호가 울렸다. 나는 목발을 짚은 채 마라톤 코스를 걷고 또 걸었다.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는 결승점이 보인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 격려의 인사로 등을 툭 치면 온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를 쉬려고 앉기라도 하면 다신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도 앉지 않았다.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9시간 53분의 ‘통과의례’
이미 짧은 겨울 해는 기울었고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다. 내가 계속 걷고 있는 게 맞는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든 게 흐려져 현실과 환상이 뒤얽히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와!”하는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수 준비를 하던 현장 요원들, 경찰관들이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결승점을 통과했다.
기록은 9시간 53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판사의 꿈을 접고 한의사가 되었다. 마라톤 이듬해인 2000년에 한의원의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장애어린이 치료에 모든 힘을 쏟았다.
내가 한의대에 간 것도, 졸업 후 곧바로 법대에 편입해 고시준비를 한 것도, 결국 고시에 실패하고 한의원을 개업한 것도 모두 운명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지금은 든다. 중간에 둘러온 과정이 있었기에 한의사로 돌아왔을 때는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나의 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택이 이뤄졌다면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처음 한의대에 갈 때부터 그것이 나의 길이었다는 점을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필연성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도 가누지 못했던 내가 앉고 일어서고 걷게 된 것, 공부를 해서 남들처럼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방치료 덕분이라는 얘기를 나는 수 없이 듣고 자랐다. 나를 업고 병원을 전전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한의원을 찾았고 그 곳에서 내가 조금씩 차도를 보이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방 치료를 받게 하셨다.
장애로부터 나를 건진 한방의 힘
서너 살 때까지도 앉혀놓으면 푹 쓰러진다고 ‘낙지’라는 놀림을 받았던 내가 일곱 살 무렵엔 집 마루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고 한다. 그런 만큼 내가 한의대를 지원한 것, 한의사가 되어 장애어린이의 치료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의사로서 나의 목표는 아주 구체적이다. ‘어릴 때의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장애어린이를 지금의 나만큼만 되도록 치료하자’는 것이다. 장애어린이가 조기에 적절한 한방치료를 받는다면 큰 차도를 보인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내가 어릴 때 만약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더라면, 부모님이 나를 포기하셨다면 나는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걷는 것만 조금 불편할 뿐 아무 지장 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화타와 같은 명의도 아니고 장애어린이 치료 비법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지금 걷지 못하는 아이가 걷게 될 수도 있다는 것,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고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치료를 진행하면서 조금씩 호전되던 아이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더 이상 차도를 보이지 않을 때처럼 답답한 순간도 없다. 왜 그럴까? 분명 나아지고 있었는데 여기가 한계일까? 밥 먹을 때도, 운전할 때도,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도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 말고 ‘비결’은 없다
정답은 없다. 적어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고민하고 책을 뒤지며 노력한다.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서른이 되던 해, 두려운 마음으로 도전했던 마라톤에서 배운 게 그것이다. 우승이나 기록 단축의 영광은 내 것이 아니고, 남들이 뛸 때 나는 뛰지 못하고 걷는다. 하지만 꾸준하게 걷기만 한다면 결승점에 다다를 수 있다.
*글=허영진 푸르메한방장애재활센터 원장
허영진 원장 프로필
1969년 인천 출생
1988년 서울 배문고등학교 졸업
1995년 상지대 한의과대학 졸업
1998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2000년 정립회관 장애아동 진료봉사
2002년 군포시복지관 장애아동 진료봉사
2004년 라파엘의 집 진료봉사
2005년 보건복지부 장관 봉사표창장
2007년~ 푸르메재단 한방장애재활센타 원장
부모님은 “괜찮다, 네가 하고 싶다면 끝까지 고시에 도전해라”하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이미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한의사 가운을 다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그 길로 가야 한다면 뭔가를 증명하고, 돌아가는 이유를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다. 출발 신호가 울렸다. 나는 목발을 짚은 채 마라톤 코스를 걷고 또 걸었다.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는 결승점이 보인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 격려의 인사로 등을 툭 치면 온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를 쉬려고 앉기라도 하면 다신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도 앉지 않았다.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9시간 53분의 ‘통과의례’
가족과 함께한 허영진 원장. 허 원장은(앞줄 왼쪽) 자신의 성장경험을 토대로 조기치료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외 진료봉사에 나선 허영진 원장. 그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희망으로 다가가길 기대한다.
1988년 서울 배문고등학교 졸업
1995년 상지대 한의과대학 졸업
1998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2000년 정립회관 장애아동 진료봉사
2002년 군포시복지관 장애아동 진료봉사
2004년 라파엘의 집 진료봉사
2005년 보건복지부 장관 봉사표창장
2007년~ 푸르메재단 한방장애재활센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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