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북미 맥킨리(6,194m) 정상에 오른 김홍빈 씨. 이 산은 1991년 등반도중 조난사고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었던 곳이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17) 장애인 최초 7대륙 최고봉 도전하는 김홍빈 씨
(17) 장애인 최초 7대륙 최고봉 도전하는 김홍빈 씨
나는 셰르파 한 명과 단 둘이 끝없이 이어진 설벽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2000~3000m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눈에 굴을 판 ‘설동’ 이나 바위에 몸을 고정해 잠을 자야 한다.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얼어버린 듯하다. 동상에 걸린 코는 감각이 없다. 어쩌면 코도 동상으로 잘려나간 열 손가락처럼 절단해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힘이 남아 있다. 포기 할 수 없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힘을 내자! 꿈을 이루기 위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곧 정상이었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2006년 2주간의 짧은 준비 끝에 도전한 티베트 시샹팡마 남벽(8,046m) 끝에서 나는 바보처럼 울고 또 울었다.
산 오르는 것이 운명이 된 사나이
산악인 김홍빈 씨(45세)는 산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이다. 그는 1991년 북미 맥킨리(6,194m)에서 동상에 걸려 열 손가락을 잃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산에 열 손가락을 바쳤다.
그는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위해 바쁘게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성공한 것은 8,000m급 4개봉과 남극대륙의 빈슨 매시프(4,897m)를 제외한 7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는 다음달 12월과 2009년 1월에 걸쳐 도전할 계획이다. 이번 원정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인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이 된다.
순천에서 자란 그는 전라남도 광주 송원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산악부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신문이나 TV를 통해 산 속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당연히 산에 올라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대학 산악부는 기대와는 달리 기합도 심하고 매우 엄격했다. 처음에는 산악부 활동이 힘들었지만 산에 다니면서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학을 들어가면 다들 미팅하느라 바쁜데 저는 산에 미쳐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산이 여대생이었고 연애대상이었죠.(웃음)”
기회가 되면 빙벽, 암벽 등 가리지 않았다. 극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위험한 산악훈련도 마다 않고 모든 상황에 몸을 적응시켰다. 산악훈련이 고되면 고될수록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몸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이 편안하게 산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에 대한 서적도 탐독했다. ‘알프스의 3대 북벽’ (아이거, 마터호른, 그랑조라스)에 대한 글을 통해 그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8,000m 14좌로 옮겨갔다.
그는 1989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꿈을 실현하기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누구나 해외에 나갈 수 있지만 그 때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했고 교육도 따로 받아야했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며 산악훈련을 하며 몸을 만들었다. “우리는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잖아요.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빵만 먹는 훈련까지 했어요. 그 덕에 지금도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요.”
모든 일상생활이 산행에 맞춰졌다. 버스에서도 앉지 않고 발힘을 기르기 위해서 까치발로 서 있었고 목적지까지 가기위해 일부러 둘러 다녔다. 그에게는 숨 쉬고 걷고 자는 모든 것이 훈련이었다.
그런 그에게 희소식이 찾아왔다. 1990년 광주전남산악연맹 추천으로 파키스탄 낭가파르밧(8,125m) 등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일까. 첫 해외원전을 악천후로 인해 고배를 마셔야했다. 산은 왜 쉽게 그에게 문을 열지 않는 것일까. 그는 좌절 속에 빠져들었다.
산에서 열 손가락을 잃다
1991년,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한 친구가 북미대륙의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6,194m)를 오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미국비자 발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일행보다 2주나 늦게 매킨리를 향할 수 있었다. 등반대와 일정이 맞지 않아 혼자 등반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초조했다. 하루 빨리 일행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초조함은 무리수를 낳는다. 그는 최소장비와 최소식량을 준비한 채 산을 올라갔다. 고산지대에서는 체력소비가 많기 때문에 먹는 게 중요한데 제대로 먹지를 못하자 체력은 점점 바닥으로 떨어졌다. 5,700m 지점에서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거기서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 거기까지만 욕심을 부려야 했지만 그는 다시 도전할 생각으로 잠깐 누웠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이미 탈진상태인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국립공원 구조대원에 의해 그는 구조됐다. 16시간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산을 내려오면서 불행히도 묶여 있던 어깨 때문에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손은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에 도착한 그를 보자 병원측에서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했다. 사람들은 그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의식의 끈을 놓아버릴 때쯤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너는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그 끈을 잡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했지만 김홍빈 씨의 두 손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말라갔다. 두 달 동안 7번의 수술이 이어졌고 결국 10개의 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3개월간 병원비도 무려 1억 5천만원이 나왔다. 알래스카의 교민들이 그의 사연을 듣고 돕기 시작하자 병원에서도 병원비를 받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산에서 당한 사고라서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젊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을 했었죠.”
그는 귀국한 후 열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방황 했다. “방문을 열지 못해 누가 열어주지 않으면 밖으로 나오지 못했어요. 혼자 속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뭉툭해진 손을 바라보며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죠.” 손가락 대신 펜치로 양말을 신으려다가 양말을 찢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의식중 손가락을 사용하려하다가 손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곤 했다.
다친 몸과 영혼을 어루만져준 산
어느 날 대학 산악회 선후배들이 그를 찾았고 다시 산을 올랐다.
“사고가 나고 처음 산에 갔을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저를 반겨주는 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어요. 산에 다니는 것이 재활훈련이었죠.”
손가락이 없다고 해서 산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암벽을 오를 때는 열 손가락이 사라진 뭉뚝한 손에 클라이밍 테이프를 감고 올랐다. 예전보다 산에 올라갈 때 더디고 몸에 더 많은 상처가 생겼지만 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산에만 오를 수는 없었다. 먹고 살아갈 직업을 가져야 했다. 돼지거름도 모아서 팔아보고 운전사, 공사장 인부, 골프장에서도 일했다. 굴착기 면허를 따려했지만 손가락이 4개 이상 있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응시도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1997년 IMF 직후,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에 무등산에 올라갔을 때에 일이다. 산에 오르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의 손가락을 보고 “저런 사람도 열심히 살아가는데, 너도 열심히 살아야한다.”라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과연 내가 열심히 살고 있나’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 꿈에 그리던 7대륙 최고봉 등반을 계획했다고 한다.
꿈은 현실로 이어졌다. 1997년 유럽 엘브루스(5,642m)와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를 시작으로 1998년 남미 아콩가구아(6,959m), 그리고 열 손가락을 잃었던 북미 맥킨리(6,194m) 등정에 성공했다. 2007년에는 호주 코지어스코(2,228m), 네팔 에베레스트(8,850m) 등 6개 대륙 최고봉에 올랐고 다음달에는 마지막 남극대륙 빈슨 매시프(4,897m)에 도전한다.
8,000m 급은 2006년 가셔브룸 ∥(8,035m), 티베트 시샹팡마 남벽(8,046m), 2007년 네팔 에베레스트(8,850m), 2008년 네팔 마칼루(8,463m) 등정에 성공했다. 아직 그가 올라야할 산이 10곳이나 남아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던 아쉬운 기억도 많다. 그 중에서도 2000년도에 등정을 시도했던 네팔 마나슬루(8,163m)는 악천후 속에서 그만 100m를 남겨두고 하산해야 했다.
“네팔 사람들은 저더러 ‘장애인의 몸으로 이 정도 했으면 다녀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비록 제가 장애인이지만 오르지 않은 정상을 올랐다고 할 순 없잖아요.”
올해 4월 네팔 마칼루(8,463m) 등반할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국 2달을 남겨 놓은 시점에 빙벽훈련을 하다가 척추 1번 뼈에 금이 가고 말았다. “이를 악 물었어요. 당연히 훈련은 하지도 못했죠. 의사는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상사실을 숨긴 채 등반준비를 했어요.”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육체의 고통을 이겨냈다. 마침내 8,463m 높이의 마칼루는 그가 정상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산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김홍빈 씨는 자신이 산을 오를 수 있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산악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선후배를 비롯해 그가 산에 오를 수 있도록 등산장비를 개조해주는 후배, ‘광주아이안’ 등이 힘이 되고 있다. 특히 광주아이안의 윤장현 단장은 8,000m 14좌 등정과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오르는데 정신적,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산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사람’이다. 그는 등반할 때 ‘셰르파와 똑같이 생활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셰르파는 산에게 제가 의지할 동지이기 때문이죠.” 상대방에게 진실 되게 대하면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는 그에게 사람은 각별한 존재다.
당초 그는 5년 안에 계획했던 등정을 끝마치려고 했는데 이미 12년을 넘고 있다고 한다. 언제 계획을 달성할 지도 미지수다. 몸과 마음은 언제든 산에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지만 문제는 경비다. 그래서 그는 셰르파와 단 둘이 올라갈 때가 많다.
“언제 계획을 달성할지 몰라요. 내일 모레면 나이 50이고 장애를 가지고 이 일을 하는 것이 무모해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성공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열 손가락이 다 있었다면 8,000m 14좌 등정의 꿈을 더 빨리 이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욕심을 부리다가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열 손가락을 잃고 더디지만 천천히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산의 의미를 물었다. “나에게 산은 친구입니다. 힘들 때 나를 받아주고, 내게 따끔하게 충고해주는 영원한 친구지요.”
산에서 열 손가락을 잃었지만 앞으로도 산을 그리워하며 산을 떠날 수 없다는 김홍빈 씨. 그에게 산은 그의 삶 전부일 뿐 아니라 그의 운명이다.
*글=임승경 푸르메재단 간사
순천에서 자란 그는 전라남도 광주 송원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산악부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신문이나 TV를 통해 산 속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당연히 산에 올라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1983년 대학산악반 지리산 동계훈련. 그의 학창시절에서 산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뒷줄 가운데)
1990년 첫 해외 파키스탄 낭가파르밧(8,125m) 등반 때 모습.(앞줄 맨 오른쪽)
조난사고로 장애를 입게 된 1991년 북미 맥킨리(6,194m) 단독 등반 때 모습.
두 손을 잃고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의료진과 함께.
1997년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른 김홍빈 씨.
2007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오르는 김홍빈 씨.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겸손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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