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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귀로 읽은 법학책…‘6년 도전‘ 빛을 보다

등록 2008-10-21 20:58수정 2008-10-22 01:03

시각장애인으로는 사법시험 2차에 처음 합격한 최영씨가 2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원에서 법학 교재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해 준 컴퓨터 화면낭독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시각장애인으로는 사법시험 2차에 처음 합격한 최영씨가 2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원에서 법학 교재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해 준 컴퓨터 화면낭독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시 2차합격’ 첫 시각장애인 최영씨
눈앞 어두워질수록
변호사 꿈도 어두워져
절망과 도전의 나날

음성 교재 제작 등
주변인들 도움 컸지만
제도적 지원 아쉽네요

21일 오후 찾아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원룸. 그가 공부했던 책상과 책장은 단출했다. 고시생의 책상에 쌓여 있을 법한 두툼한 <민법 총칙>이나 <형사소송법 해설서>도 없었고,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만한 점자책도 없었다. 대학 수업교재로 쓰는 법학개론 두어 권과 노트북이 다였다.

책상의 주인은 ‘건국 이래 최초의 시각장애인 사법시험 2차 합격자’ 최영(28)씨다. 최씨는 이날 여성 합격자 수가 384명(38%)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사법시험 2차 합격자 1005명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는 시각장애 3급으로, 왼쪽 눈은 측정이 불가능하고, 오른쪽 눈은 안경을 써도 시력이 0.2~0.3밖에 나오지 않는다. 맨눈으로는 빛을 겨우 분간하는 정도다.

“오늘 낮 12시께 합격했다고 법무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일 먼저 부모님께 전화했습니다. 어머님이 ‘잘했다’는 말만 하시면서 많이 우셨어요.” 그의 부모는 경남 양산에서 일용직 일을 하며 그에게 매달 50만원씩 생활비를 보냈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 저편에 그가 넘어야 했던 절망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부터 안 보였던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 밤길을 가면 자꾸 부딪히고 걸려 넘어졌다. 그저 눈이 나쁜 줄로만 알았다. 시력은 계속 떨어졌지만, 왜인지 몰랐다. “초등학교 땐 날아오는 공이 보이지 않아 공놀이는 어림없었죠. 친구들에게 한 번도 먼저 인사해 본 적이 없어요. 목소리 듣고 인사했죠.”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한의원을 찾았던 고3 어느 봄날, 한의사가 ‘망막 박리일 수도 있다’며 안과 검진을 권했다. 결과는 ‘망막색소 변성증’. 점차 시야가 좁아져 실명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재수 끝에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꿈은 그의 시력처럼 사그라드는 듯했다. 꿈꾸던 변호사가 되려고 2003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2005년까지는 다른 이들과 나란히 필기시험을 치렀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책 한 쪽 한 줄밖에 안 보이더니, 이내 한 글자만 보이고, 2년 전부턴 글자를 전혀 볼 수 없게 됐거든요.” 사용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점자책도 소용이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시각장애를 지닌 친구가 “일본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으로 시험문제를 읽어 준다”고 귀띔했다. 2006년 1월 법무부에 신청서를 냈고, 법무부는 2006년 2월부터 국가시험 최초로 시각장애 응시자에게 컴퓨터를 제공하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점자를 읽지 못하는 그에게 ‘장인욱 복지재단’은 시험 교재들을 컴퓨터 텍스트파일로 만들어 줬다. 한 권 만드는 데 석 달씩 걸리는 작업이다. 텍스트파일들과, 이것을 읽어 주는 화면낭독 프로그램에 의지해 기본서 14권 가량을 독파했다. 학원 강의나 동영상 강의를 받지 못하니, 좁은 원룸에 틀어박혀 “7시에 일어나 12시에 잠들기까지 하루종일” 강의 테이프를 들었다. 식사 때면 찾아와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던 친구들도 없어선 안 될 버팀목이었다.

“모든 게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라던 최씨는 ‘아쉬움’도 이야기했다. “교재나 장애인 이동권을 사회적 제도로 뒷받침해 준다면 장애인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어요. 일본에서는 20년 전에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나왔고, 미국에도 시각장애인 변호사들이 많고요. 사회적 뒷받침만 있었다면 제가 최초는 아니었을 겁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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