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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이사람] “올 봄에 박사 따러 미국 유학가요”

등록 2008-01-04 19:39

‘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래머’ 시각장애인 가현욱씨
‘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래머’ 시각장애인 가현욱씨
‘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래머’ 시각장애인 가현욱씨
연세대 산학협력단 교육공학연구실에서 일하는 가현욱(36)씨는 2급 시각장애인이다. 가씨는 코 앞의 선명한 원색 정도만 식별할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지만, 학교 안을 거닐 때면 굳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쓰지 않는다. 1998년 입학한 그는 한동안 ‘교문에서 연구실까지는 1357걸음’, ‘공학관 계단수는 2층까지 8개·7개·8개·7개’라는 식으로 거리감을 익히고 그 감에 의존해 캠퍼스를 거닐었다. 물론 처음에는 사고도 많았다. 차량 진입을 막는 볼라드에 걸려 넘어진 것은 헤아릴 수 없고, 심지어 뚜껑이 열려있는 맨홀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턱과 눈썹에는 ‘무모함’의 대가인 꿰멘 상처가 선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상처가 쌓인 만큼 거리감도 좋아졌다. 이제 교정은 손바닥만큼이나 훤하다. 전공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도 그만큼 늘어갔다.

같은 장애 부모들 떠나 고아원 성장
7년간 물리치료사 생활…연대 입학
스크린 리더·점자변환 등 무료 보급
피츠버그대 재활공학 박사과정 도전

가씨의 삶에도 캠퍼스만큼이나 장애물이 많았다. 부산에서 시각장애인 부부 사이에 태어난 그는 가계가 어려워 일곱살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여건이 좋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어 중학교 때 무작정 상경했지만 돈이 없었다. 당시 5900원이던 수학 참고서를 점자판으로 사려면 10만원이 더 들었다. 선배들이 쓰고 버린 책으로 악착같이 공부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말렸다. 차라리 일찍 포기하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 길이라는, 배려 아닌 배려였다. 그즈음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 성적 때문에 자살한 주인공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끝내 무너진 그는 공부를 포기하고 7년 가까이 물리치료사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입시철만 되면 마음이 아팠다. 96년 무렵 장애인 친구 세 명이 잇따라 자살을 한 사건이 그의 삶을 바꿨다. 장애가 생을 버려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책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98년 연세대에 입학했다.

그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화면의 내용을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 컴퓨터상의 문자를 점자로 변환해주는 점자번역 프로그램, 시각장애인 전용 웹 전자게시판 시스템 등이 그의 작품들이다. 시각장애인 전용 전자게시판들(telnet://bbs.kbuwel.or.kr, telnet://bbs.silwel.or.kr)에서는 그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를 통해 인터넷 세상을 넘나들 수 있게 됐다.

가씨는 올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5월 미국 피츠버그대학 재활공학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다. 한 복지재단에서 해마다 2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한해 유학비용 5만달러에는 턱없이 못미친다. 하지만 가씨는 대수롭지 않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가서 일해서 벌어야죠.” 숱한 장애물을 자신의 힘으로 넘어온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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