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희진 통신중계사가 지난 3일 서울 등촌동 한국정보문화진흥원 통신중계서비스센터에서 화상으로 접속한 한 청각·언어장애인과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반씨는 전화로 연결된 비장애인에게 수화 내용을 육성으로 전달해줬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구인광고 전화번호도 ‘그림의 떡’
수화통역센터에 며칠전 예약해야
미국선 법제화로 24시간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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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계셨기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들아, 네가 있어 자랑스럽다. 사랑한다.” 기숙사에 있던 아들이 대학원 논문 통과 소식을 막 듣고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들은 기쁨을 나누면서 함께 울먹였다. 아들은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감사합니다”는 말을 전했고, 아버지도 평생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왜 평생 처음일까? 아들은 청각 및 언어장애인이다. 전화통화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준 것이 ‘통신중계서비스’(TRS)였다. 비록 남의 목소리를 빌렸지만 글이 아니라 말로 감사와 사랑의 목소리를 처음 전달받았다. 이들 사이의 대화를 이어준 통신중계사 반희진씨는 “아드님이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말로 아버님한테 전했고, 아버님의 말씀과 함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있다는 사실도 아들에게 문자로 다시 알렸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전화없는 일상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청각 및 언어장애인들은 전화를 전혀 이용할 수 없다. 듣고 말하지 못하니 장애인 구인광고에 나오는 전화번호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지난해 2월부터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개설한 ‘통신중계 서비스센터’가 이들을 돕고 있는 정도이다. 청각·언어장애인이 문자 또는 영상(수화)으로 센터에 접속하면 중계사들이 비장애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육성으로 전달한다. 요즘 이용량은 하루 200통 가량이다. 중계사들은 구인회사에 전화를 걸어 면접 약속을 잡기도 하고, 직장 상사한테 급하고 중요 사항을 확인하기도 한다. 치킨, 자장면, 피자 배달 요청도 상당수에 이른다. 심지어는 말싸움을 중계하는 일도 있다. 육두문자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그대로 읽어주기도 한다. 진흥원의 홍경순 팀장은 “처음엔 ‘통화중’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전화와 담을 쌓고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며 “그들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목적으로 전화를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전화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1~3급 청각·언어 장애인은 모두 8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전화로 통화할 가족과 친구 등을 따지면 100만명 가까운 사람이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통신권’의 제한을 받고 있는 셈이다. 청각·언어 장애인들은 현재 전국 122개 수화통역센터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이곳은 며칠 전에 예약을 한 뒤 직접 찾아가야 전화중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진흥원의 통신중계서비스센터도 400명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할 뿐이다. 미국에선 이미 1990년대에 통신중계서비스를 법제화해 하루 24시간 365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비용은 전화가입자들이 매월 10센트 정도씩 내고, 나머지는 통신업체가 떠안는 구조이다. 오스트레일리아도 1990년대부터 이 서비스를 전면 실시하고 있다. 비용은 통신업체들이 분담한다. 정보통신부는 통신중계서비스를 전면화하는 데 200억원 가량 들 것으로 추산한다. 이는 전화가입자 6천만명(유·무선 중복계산)이 매달 5원씩만 부담하면 되는 규모이다. 정보문화진흥원은 올해 안에 구체적인 수요를 파악해 향후 사업방향을 잡을 계획이다. 청각·언어 장애인들의 통신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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