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사고로 키145㎝ 몸무게 40㎏ 척추장애
5·18 지표 삼아 광주 금남로서 사회과학서점 운영
‘난장이’ 버리고 미술평론가 ‘이세길’로 이름 알려
5·18 지표 삼아 광주 금남로서 사회과학서점 운영
‘난장이’ 버리고 미술평론가 ‘이세길’로 이름 알려
[이사람] 장애 이긴 미술평론가 정건호씨
23일 오전 10시 광주시 동구 전남대의대 해부학교실 강당. 주검 기증자를 위한 특별한 장례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시민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길 꿈꾸며 소설처럼 살아온 ‘난장이’였다. 휴대전화로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 예술인들이 달려와 눈물로 동료를 떠나보냈다.
숨진 이는 광주비엔날레재단 전시부 교육담당 정건호씨. 그는 47년 생애에서 세가지 모습으로 살았다. 척추장애를 넘어 세파를 헤쳐나간 사회과학서점 주인 ‘정건호’, 이 풍진 세상에 아름다운 길을 찾고자 했던 미술평론가 ‘이세길’. 또 전라도의 멋과 맛을 속살 깊이 보여준 인터넷 문장가 ‘찔레꽃’으로도 동료들의 가슴 속에 남았다.
그는 1959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짚단 위에서 놀다 떨어져 등뼈를 심하게 다쳤다. 이 사고는 그가 어른이 돼서도 키 145㎝ 몸무게 40㎏ 안팎에 머무는 척추장애로 이어졌다. 평생 제대로 눕지 못하고 모로세워 잠자야만 했다. 불편한 자세로 심폐기능마저 갈수록 약해졌다.
이런 역경에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행동은 제약을 받았지만 사고는 자유롭고 드높았다. 1979년 건국대 철학과에 들어가 전방입소 반대운동을 벌이며 사회의식을 배웠다. 대학 2학년 때 광주5·18이 터지자 전남도청으로 달려가 학생수습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후 마지막 항쟁에서 물러났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5월’과 ‘광주’를 인생의 지표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시험에 붙었지만 신문사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울적해진 그는 전남 영광군 칠산 바닷가를 찾아가 꺼이꺼이 울었다. 거기서 난장이 정건호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돌아왔다.
한동안 방황했던 그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믿음으로 동구 금남로 뒷길에 사회과학서점 ‘남녘서점’을 열었다. 86~94년 서점을 운영하며 17차례 압수와 수색을 당했지만 무심하게 웃어넘겼다.
그는 서점 근처 광주 예술의 거리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미술의 사회성과 공공성에 눈떴다. 미술평론에 끌린 그는 이세길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광주의 작품과 화가를 새롭게 읽어내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9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판화작가 김해성론’이 당선하면서 열매를 맺었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유럽의 서양미술을 순례하는 배낭여행을 홀로 다녀오고, 광주미술인공동체와 광주민예총 등지에서 활동하며 식견을 넓혀갔다.
97년 창설 2년을 맞은 광주비엔날레재단에 입사했다. 그는 줄곧 전시부에서 일하며 시민과 관객의 안목을 높이는 미술교육에 온갖 열정을 쏟았다. 그러다 올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지병인 심폐증으로 쓰러졌다. 그는 석달 동안 외롭게 투병하다 주검을 연구용으로 기증하고 따뜻한 마침표를 찍었다.
사진찍기를 즐겼던 그는 유산과 가족 대신 주변의 풍경과 일상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한 사진 수천장과 쪽글 수백편을 남겼다. 필명 찔레꽃으로 활약했던 인터넷 공간(jeonlado.com의 자유게시판, gwangju.webhard.co.kr의 남녘-기억)에 들어가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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