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돕는다는 기쁨으로 시작한 이 일은 최금숙씨에게 스스로 독립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만졌는데 근육이 잘 풀리면 ‘성격이 좋으시네요’ 그래요. 주인 닮아서 근육이 착하나봐요. 웃으려고 하는 소리예요.”
20년 경력 안마사 최금숙(57)씨가 해준 이야기. 금숙씨는 상대의 어깨를 살짝 쥐듯 만져보더니 흰 수건을 대고 모지(엄지 뼈마디 부분)를 이용해 꾹 누른다. ‘압을 준다’고 한다.
“저희는요, 근육을 만지면 그 사람이 어떤 자세를 주로 하는지 알아요.”
근육 모양으로 평소 취하는 자세를 알고, 그 자세로 직업을 안다. 뭉친 근육만 아는 게 아니다. 속이 허한지, 소화는 잘되는지, 물은 많이 마시는지. 보이지 않아도 이 사람 몇 살쯤 되겠구나 알 수 있다고 했다. 근육이 말해준다.
“평소에 이렇게 누워 주무시지요? 어깨를 만져도 지금 다리를 어떻게 하고 누웠는지 알 수 있어요. 다리부터 목, 어깨로 근육이 이어지거든요.”
인체의 신비다. 20년 전, 서른일곱의 최금숙씨는 이 신비로움에 빠졌다. 해부도를 본떠 만든 인체모형을 손으로 더듬으며 몸을 알아갔다. 미세하게 튀어나온 혈관과 결을 달리하는 근육이 손끝에 느껴지면 즐거웠다. 절실한 만큼 그랬다. 6년 만에 나온 세상이었다.
안마치료사들의 아킬레스건은 손이다. 손가락 힘으로 누르다간 다치기 일쑤다.
안마는 힘을 많이 쓰는 일이다. 근육을 세세하게 만지는 섬세함과 집중력도 필요하다.
“1997년도에 시각장애인 되고 집에만 있다가, 안마를 배워서 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짧은 문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병실에 있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 내 눈이 그런 줄 모르고 엄마가 불을 끈 줄 알았어요. 불 좀 켜달라고.”
며칠 전부터 열감기 증상이 있었다.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 결핵성 뇌막염이라고 했다. 고열은 시신경을 손상시켰다.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빛과 색으로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라 그의 눈앞엔 낯설고도 어스름한 화소와 잔여물, 어둠이 교차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낯설고 두려웠다. 그래서 꼼짝할 수 없었다.
“나쁜 생각도 많이 했어요. 이 젊은 나이에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방 안에서 금숙씨는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존재할 이유를 찾으려면 자신의 쓸모를 새로이 찾아야 했다. 당시 많은 시각장애인이 그 쓸모를 ‘안마’에서 찾았다. 안마수련원에서 기술을 배우면 국가 공인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것을 업 삼아 살라고 했다. 그 말에 5년 만에 문을 열고 나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머나먼 통학길이었다.
“도봉구 아시죠? 도봉역에서 1호선을 타고 도봉산역으로 가서 7호선으로 갈아타고 건대입구역까지 가서 거기서 2호선을 타고, 안마수련원이 있는 역삼역까지 가는 거예요. 진짜 어떻게 다녀야 하나. 우리 여동생 직장이 군자역 쪽이었어요. 도봉산역에서 동생을 만나면 건대입구역에 저를 내려줘요. 그때부터는 혼자 가야 하는데. 올 때는 같이 수업 듣는 동료 중에 약시인 분들이 있어요. 거기에 섞여 가요. 그 사람들 가는 쪽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종로3가로 간다고 하면, 거기서 나 1호선 태워주라 하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2년을 다녔다. 2500여 시간 수업을 들어야 안마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장애인활동지원 제도조차 없던 때였다. 구청에 연락해도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래도 저는 이걸 눈물을 머금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배우지 않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글자(점자)를 배우고, 걷는 법(독립 보행)을 배우고, 문 여는 법을 배우고, 가스레인지 켜는 법을 배우고, 식사하는 법을 배웠다.
“반찬 하는 것도 수업 때 알려줘요. 꼼꼼하게 가르쳐주진 않지만, 동료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한다, 너도 이렇게 해봐라 하는 거죠.”
살림을 배우고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가서 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5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과정을 배우면서 우등상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다행히도 배우는 일은 즐거웠다.
“생전 처음 배우는 거잖아요. 해부학부터 배워요. 우리 때는 시침도 배웠어요. 내 몸에다 내가 침을 찌를 때는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무서워서 발발 떨며 했어요. 그래도 너무 기뻤어요. 내가 이걸 해서 사람들 사이로 나갈 수 있구나. ”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금숙씨가 구한 첫 직장은 안마시술소였다. 실망스러웠다.
“그때는 시각장애인이 갈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없던 상황이었어요. 야간 업소 이런 데도 있고. 가보니까 너무 열악해요.”
안마사들을 고용했지만, 염불이 아닌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업소였다. 안마사들에게 제공하는 식사마저 부실했다.
“눈이 안 보이니까 어떻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거겠죠. 원장하고 많이 대립했어요. 힘든 일 하는 안마사를 왜 이렇게 대우하냐고.”
그만뒀다. 다른 곳에 가봤자 비슷하겠다고 생각해서 직접 안마원을 차리기로 했다. 금숙씨의 표현대로라면, 과감했다. 시력을 잃기 전에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생계와 육아를 동시에 책임지면서도 어려운 줄 몰랐다.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는 덕분이었다.
“원래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에요. 뭔가 일을 저지르곤 해요.”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안마원을 차렸다. 어머니와 자매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꾸려가고 싶었다.
“저 나름의 재활이고, 독립이었죠. 혼자 힘으로 하려니까 힘이 들긴 했어요. 안마하면서 전화도 받고 예약도 받아야 하는데,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그래도 거기서 사람들 만져주는 보람을 알았어요. 참 즐겁게 일했어요.”
최금숙씨는 서른한 살 때 시력을 잃었다. 6년 동안 가라앉아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 건 안마였다. 지금은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서 참손길지압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는 수련원에서 만난 약시 동료가 도와주기도 했다. 대학이 인근에 있어, 운동하다가 몸을 다친 체육과 학생이 많이 왔다.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즐거웠다. 그래도 으뜸은 어르신들과의 대화였다.
“연세 많으신 분들 안마하러 출장도 다니는데, 와상환자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늘 누워 있잖아요. 제가 눈 그렇게 되고 1년을 병원에 있었어요, 열이 안 떨어져서. 누워 있어보니 그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그분들이 움직일 수 없는 근육을 제가 만져준다는 생각으로 해요.”
정부가 몸이 불편한 노령층에 안마 바우처(이용권) 제도를 시행한 뒤, 어르신을 만날 일이 늘었다. 사실 일 자체는 힘들다. 안마는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 안마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몸 근육 뭉치고 관절 닳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람을 얌전히 눕혀놓고 하는 일이 아니다. “만져지지 않는 근육이 많아요.” 속 깊이 자리잡은 근육이다. “그럴 땐 압을 깊숙이 줘야 해요.” 무작정 손에 힘을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세에 따라 만져지는 근육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 안마받는 사람을 옆으로 눕히기도 앉게 하기도 한다. 거동이 어려운 사람을 시술할 때는 그 작업을 안마사가 할 수밖에 없다. 힘이 더 든다.
그래도 어르신들이 자신을 기다려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았다. 아픈 곳만 징얼거리는 게 아니다. 금숙씨의 손을 따라 노곤하게 풀리는 근육처럼 지난밤 꿈부터 살아온 세월까지 하나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내가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만져주는 그런 일을 하는구나.”
안마를 처음 배울 때, 주변에서 이 일이 직업도 되고 봉사도 된다고 했다. 이 몸으로 누굴 도울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 말이 참 끌렸다. 그 말처럼 살고 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안마를 배웠고 안마원을 차렸다. 그 기술로 ‘좋은 일’도 한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배운다.
“도전 중 하나가 뭐냐면, 시각장애인은 보통 아로마마사지 하는 걸 두려워해요. 손에 힘 주고 압 주는 것을 버릇으로 했는데, 오일을 바르면 손이 미끄러져요. 그리고 오일이 바닥에 흐르기라도 하면 무섭잖아요.”
낯선 재료, 파악되지 않은 동선, 익숙한 위치에 없는 사물은 시각장애인에겐 위험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기술과 도구는 그들이 애써 얻은 익숙함을 흐트러뜨린다. 하지만 이들은 그 두려움과 막막함을 이미 숱하게 맛봤다.
“아니 배우면 되지, 왜 못해요. 시각장애인이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마도 뭣도 아무것도 못해야죠.”
금숙씨는 씩씩하게 아로마마사지를 배우러 갔다. 강의실에 자기 혼자 시각장애인이었단다. 어떻게 수업을 들었나 싶은데, 오히려 강사는 설명을 한번에 알아듣는 그를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우리는 근육을 세세하게 알잖아요.”
만져야 하는 근육을 잘 찾아냈다.
“근육이 일자로만 연결된 게 아니에요. 이 근육 하나를 잡아주기 위해 지그재그로 이 속에 다른 근육이 들어가 있어요.”
근육을 만지는 손동작은 수강생 짝지의 손을 만져 익혔다. 어디를 이용해서 힘을 주는 걸까. 종종 다른 사람에게 안마를 받을 때도 안마를 잘한다 싶으면 그가 취했을 손 모양을 떠올린다고 했다. 집에 와서 그 자세를 만들어 꾹 눌러본다. 그렇게 기술을 익혔다.
지금도 틈만 나면 안마 수업을 들으러 간다. 수련원에서 안마에 홀딱 빠져 2년을 배웠지만, 막상 현장에 나오니 그것만으로 안 되더란다. 사람 몸이 가지각색이었다. 심지어 근육 뭉치는 모양새도 다르다.
“독소(활성산소)가 뭉쳐서 근육을 만지면 볼펜 촉처럼 뾰족뾰족하게 나온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모래밭처럼 까끌까끌한 게 자글자글해요. 그건 근육이 많이 손상됐다는 이야기예요. 만져서 아스팔트처럼 매끄럽게 해줘야죠.”
아로마, 경락, 스포츠, 발, 산모관리 마사지… 자신이 배운 안마 기술을 나열한다. 안마사로 살아야 한다면, 그 영역에서 최고는 못 돼도 모르는 것은 없이 살고 싶다고 했다. “내가 치료사인데, 아픈 사람이 묻는 걸 모르면 그건 치료사가 아니잖아요.” 몸도 마음도 풀어져 안마실을 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여전히 좋다.
기술만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배우고 센터(안마소) 운영에 대해서도 배운다. 7년 전, 금숙씨가 운영하던 안마소를 접고 참손길공동체협동조합에 가입한 까닭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주체가 된 협동조합이라는 타이틀에 끌렸다. 혼자일 때보다 기술도, 운영도, 세상 돌아가는 일도 더 체계적으로 배운다고 했다. ‘돌봄 안마’라 하여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사업도 한다. 안간힘을 쓰며 홀로서기에 도전하던 시절은 지났다. 동료들이 생겼다. 현재 그는 협동조합 소속 마곡센터(안마원)를 책임지고 있다.
20년 세월은 20년 경력이 되어 돌아왔다. 다만 금숙씨의 몸도 나이가 들었다.
“손가락 힘으로 누르면 안 돼요. 그러면 다쳐요. 여기에 몸의 무게를 싣는 방식으로.”
말은 이리해도 오른쪽 엄지가 부어 있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주무른다. 통증도 업이 됐다. 100살 시대에 무엇을 다시 직업 삼아 살아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20년 전, 금숙씨가 세상에 나올 수단은 안마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주는 것(의료법 제82조)이 합당한가 하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이다. 달라지긴 했다. 자기 직업을 안마사로만 국한하지 않고 진로를 확장하려는 젊은 세대의 움직임이 있다. 전통적 일자리를 지키려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도 협동조합 같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금숙씨와 처음 인사를 나눈 자리에서 나는 음성인식 기기가 널리 쓰이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 덕에 사회생활이 좀 수월해졌겠다는 말이었다. 코로나19 시기 급격히 늘어난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를 잊었다. 점자 표시 없이 매끈한 액정 화면이 가득한 세상이다. 금숙씨가 활동지원사도 없이 혼잡한 지하철역에 흰 지팡이 하나 들고 선 그 시절처럼, 지금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냉담하다. 변했다는 세상은 이들이 사회로 나올 수단을 얼마나 마련해놓고 있을까.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