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러미 미즐리 제공
물바람숲
식물이 번식을 위해 동물을 속이는 일은 흔하다. 어떤 난의 꽃은 암컷 벌 무늬를 갖춘데다 페로몬까지 풍겨 수벌을 끌어들이고 그 과정에서 꽃가루받이를 한다.
그런데 씨앗으로 곤충을 속이는 식물의 번식전략이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제러미 미즐리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 진화생물학자 등이 과학저널 <네이처 플랜츠> 5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지역은 남아공의 건조한 덤불지대로 산불이 잦은 곳이다. 이곳에 분포하는 벼목의 한 고유식물은 지름이 1㎝가 넘는 크고 둥근 씨앗을 맺는다. 가까운 친척들의 씨앗이 매끈한 검은색인 데 비해 이 식물의 씨앗은 훨씬 큰데다 짙은 갈색의 거친 표피를 지녔다.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 사는 영양의 배설물과 꼭 닮았다. 놀랍게도 이 씨앗은 자극적인 냄새를 풍겼는데, 영양의 배설물에서 나는 것과 흡사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크기와 형태, 냄새로 미루어 초식동물의 배설물을 흉내 내 쇠똥구리를 속이려는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실험에 나섰다. 195개의 씨앗을 던져놓았는데 하루 만에 27%가 쇠똥구리에 의해 땅속에 묻혀 있었다.
이 지역에서 식물 씨앗을 주로 먹는 쥐는 이 씨앗이 내는 휘발성 물질은 싫어했다. 하지만 쇠똥구리한테는 잘 굴러가는 배설물로 보였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땅에 묻힌 씨앗에는 쇠똥구리의 알이 없었고 뜯어먹은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쇠똥구리가 알을 땅에 묻은 뒤에야 먹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쇠똥구리는 배설물을 굴려 가 땅에 묻은 뒤 알을 낳고 일부를 먹기도 한다.
이런 속임수는 산불이 잦고 불에 탄 뒤 재생하지 못하는 이 식물에게 매우 중요한 무기였을 것이다. 쇠똥구리가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데다 수분이 많은 땅속에 심어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씨앗이 딱딱한데다 쇠똥구리한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식물의 이런 씨앗 확산은 놀라운 속임수의 사례”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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