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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헌법 1조, 국가는 기후변화와 맞서 싸운다” 바꿔가는 시민들

등록 2021-04-05 09:58수정 2021-12-29 14:56

유럽 각국 ‘기후시민의회’ 조직

프랑스·영국 등 ‘기후의회’ 잇따라
성별·나이 등 반영해 시민 목소리 전달

“시민들 더는 기후위기 캠페인 대상 아냐
국내서도 시민과 소통하는 장 마련돼야”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150명의 프랑스 기후시민의회 의원들이 2019년 10월 한자리에 모였다. 프랑스 기후시민의회 누리집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150명의 프랑스 기후시민의회 의원들이 2019년 10월 한자리에 모였다. 프랑스 기후시민의회 누리집

“우리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회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시민입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프랑스 기후시민의회’(CCC: 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가 지난 1월29일 발간한 보고서 서문에 담긴 내용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부의 유류세 인상 조치에 항의하며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에 대응하고자 2019년 기후시민의회를 조직했다. 그는 그동안 직접 정책 후원자 구실을 하면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성별, 나이, 지역 등 인구 대표성을 반영한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150명의 시민 의원들은 지난해 6월까지 약 9개월간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대 대비 최소 40%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우리 돈으로 72억원의 예산을 배정하고, 선발된 시민에게 하루에 11만원의 활동비를 지급했다. 주말에 일하는 사람이나 아이가 있는 부모들에겐 각각 시간당 1만4천원, 2만4천원가량의 추가 수당을 지급했고, 먼 지역에서 오는 시민들에겐 숙박 및 교통비를 지원했다.

이들이 내놓은 460쪽짜리 보고서에는 149개 제안이 담겼다. 이 중에는 탄소 배출량이 많은 수입 상품에 대한 국경세 도입,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기차표 부가가치세율 10%에서 5.5%로 인하, 고속도로 통행 속도 130㎞/h에서 110㎞/h로 제한 등 정부가 나서야 하는 정책부터 육류 소비나 음식물 쓰레기 배출 줄이기, 출퇴근 및 통학 시 자전거, 카풀 이용 등 시민들이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제안도 담겼다.

프랑스 기후행동네트워크는 지난해 6월 프랑스 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7명이 기후시민의회의 제안에 대해 들어봤고, 이들 대부분이 시민의회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시민의회가 제안한 정책들이 프랑스인들의 아침 식탁에 대화 소재로 오르내릴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고도 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지난달 16일에 프랑스 하원은 헌법 1조에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 의무로 명시하는 내용인 ‘국가는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존을 보장하고 기후변화와 싸운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가결하기도 했다. 이 조항 역시 시민의회가 제안한 내용이다.

영국 환경운동단체 ‘멸종 저항’이 시민의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 환경운동단체 ‘멸종 저항’이 시민의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기후시민의회가 구성됐다. 영국 의회는 환경운동단체 ‘멸종 저항’의 시민의회 구성 제안에 따라 ‘영국 기후시민의회’(CAUK: Climate Assembly UK)를 소집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인구 대표성을 반영한 무작위 추첨을 통해 108명의 시민 의원을 선발했다. 선발 기준에 ‘기후변화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라는 문항을 넣어 기후변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점이 특징이다. 기후변화는 관심 유무를 떠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지난해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온·오프라인 회의로 2050년까지 영국이 탄소 중립(넷제로: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줄이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뉴캐슬 출신의 마크(46) 의원은 “추첨 결과를 받고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았다. 내게 주어진 발언권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다”고 했고, 버킹엄셔 출신의 엘리(21) 의원은 “내가 청년 시민 의원이라 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활동이 청년 세대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민 의원들이 제안한 556쪽짜리 보고서에는 무엇을 먹고, 쓰고, 사야 할지 등 일상에서 시민들이 탄소 배출 저감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대안과 정부의 지원 방안 등 50여개 제안이 담겼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항공기를 자주 이용하고 멀리 가는 승객에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지역사회 선순환 구조 마련과 환경오염 방지를 위해 지역 생산품·농산물 소비를 장려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시민의회는 평범한 시민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며 능동적인 시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장이 된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모방한 시민의회는 선거가 아닌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시민 대표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어느 쪽의 이해관계도 대변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민 모두에게 좋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함께 성장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기후시민의회 의원들이 줌을 통해 어린이 기후의회 의원들과 만나 기후위기 대응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기후시민의회 유튜브 갈무리
스코틀랜드 기후시민의회 의원들이 줌을 통해 어린이 기후의회 의원들과 만나 기후위기 대응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기후시민의회 유튜브 갈무리

이런 토론의 장을 마련해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은 프랑스, 영국을 넘어 스코틀랜드, 독일, 스페인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2019년 개정된 기후변화법에 근거해 16살 이상 시민 105명을 무작위 추첨하여 의회를 구성했다. 일, 교육, 쇼핑 등 모든 활동이 지역 내에서 가능하도록 하는 ‘20분 커뮤니티’,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맞춤형 직업 훈련과 자원봉사 기회 제공 등의 제안 초안이 담긴 중간보고서가 지난달 24일 공개됐다. 오는 5월에는 의회 권고안이 담긴 최종보고서가 발표될 예정이다. 법률에 근거해 스코틀랜드 정부는 보고서 발표 후 6개월 이내에 응답해야 한다.

스코틀랜드는 아이들도 기후위기로 크게 영향을 받는 당사자라고 여겨 10개 학교에서 모집한 100여명의 아이로 구성된 ‘어린이 기후의회’를 만들었다. 어린이 의회도 시민의회와 협력적 관계를 맺고 활동한다. 스코틀랜드 중부 파이프 지역 출신의 한 의원(11)은 동료 어린이 의원들이 만든 보고서에서 “내가 다른 사람과 의견을 공유해 스코틀랜드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분되고 자랑스럽다”고 했고, 에든버러 출신의 의원(13)은 “아이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권리가 있고, 어른들로부터 답변을 얻을 권리도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의원들은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 동안 스스로 기후변화에 대해 학습하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고, 3차례의 설문조사와 투표를 통해 42개 우선순위 제안을 정리했다. 제안에는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동물 서식지 개발 금지, 사람들이 전기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가격을 낮추거나 대여해주는 정책, 어린이에게 친환경 식단 교육 제공 등이 담겼다. 설문조사 결과 의회에 참가한 어린이 절반 이상이 기후변화와 아동 인권에 대해 학습할 기회였다고 답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럽 내에서 기후시민의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뭘까? 영국 기후시민의회 진행촉진자(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한 클레어 멜리어 연구자는 “정부나 의회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마련한 기존 정책에 대한 국민 신뢰가 부족하고, 실제 효과도 미미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직접 대안을 마련하는 기후시민의회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벨기에 싱크탱크 ‘카네기 유럽’에 기고했다. 그는 “물론 아직 효과성 측면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일반 시민들끼리 장시간 학습하고 토론한 결과 정치인들이 추진한 것보다 훨씬 더 야심 차고 생활 체감형의 정책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은 어떨까? 지난해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결의’를 채택했고, 정부는 그린뉴딜 종합계획에 이어 올해 ‘2021 탄소 중립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탄소 배출 감축 목표와 방법이 빠졌다는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정부와 의회, 재계를 중심으로만 짜인 시나리오 속에서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시민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은 “시민을 더는 기후위기 캠페인 대상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 뒤 “계획 수립부터 대안 제시 단계까지 정부 및 의회와 시민이 쌍방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돼야 하고, 적절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는 “한국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정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시민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영국, 프랑스 시민들이 나서자 기후위기 의제가 전국적으로 파급력을 갖고, 이들이 제안한 정책들이 정부와 의회에서 강력한 집행력도 얻을 수 있게 됐다. 우리도 한번쯤 시도해볼 법한 사례”라고 했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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