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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기후변화 취약 식물들에겐 바람구멍이 멸종 막을 ‘숨구멍’

등록 2020-10-16 05:00수정 2022-01-03 13:24

[기후변화 멸종의 위기, 빙하기 식물을 찾아서]
④ 연천·홍천 ‘얼음골’ 식물들

주변 서늘하고 습해 이끼들 가득 깔려
주저리고사리·장수만리화·흰인가목…
‘기후변화 모니터링’ 표찰 참고지표로

전국 풍혈 25곳중 3곳만 희귀식물자생지 지정
10곳은 사유지…주인들 더러 냉장고로 쓰기도
“북방계 희귀 자생식물의 보고…보전조처 시급”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의 풍혈. 인근이 서늘하고 습기가 많아 입구에 이끼가 가득 자라있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의 풍혈. 인근이 서늘하고 습기가 많아 입구에 이끼가 가득 자라있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④ 연천·홍천 ‘얼음골’ 식물들
④ 연천·홍천 ‘얼음골’ 식물들

지난 6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도로에서 수십미터 벗어난 얕은 산비탈에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부서져 내린 듯 바위들이 비탈면에 쌓였고, 바위틈으로 냉기가 새어 나왔다. 이날 연천의 기온은 영상 10도 안팎이었다. 안종빈 국립수목원 연구원이 열화상 카메라로 취재진 앞에 쌓인 바위를 비췄다. 붉고 파란 화면이 보여준 가장 낮은 온도는 4.6도, 주변 온도는 10.5도였다. 이날 <한겨레>는 ‘얼음골’로 불리는, 풍혈을 취재하기 위해 국립수목원 연구진들과 이곳을 찾았다.

풍혈은 우리말로 바람구멍이다. 여름철엔 찬 공기가 나오거나 얼음이 얼고, 겨울이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바위틈을 이른다. 한반도 남쪽엔 이런 풍혈이 25곳 있다. 관광지로 조성된 경남 밀양의 얼음골이 가장 유명하다. 일본엔 80곳, 미국엔 400곳의 풍혈이 보고돼 있다. 풍혈은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 습하다 보니 바위에 이끼가 가득하다. 주변 식물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현재 추세대로 기후변화가 계속되면 가장 먼저 한반도에서 사라질 ‘빙하기 식물’들이다. 동행한 공우석 경희대 교수(생물지리학)는 “산 경사가 급한 곳에 주로 풍혈이 생긴다. 과거 빙하기 얼음이 바위를 부수고, 지하수가 바닥으로 흐르는 곳에 돌무더기가 두껍게 쌓이면서 풍혈이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경기 연천 동막리 풍혈지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 ‘흰인가목’. 연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경기 연천 동막리 풍혈지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 ‘흰인가목’. 연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여름철 찬 공기…기현상 보이는 곳” 차도에서 풍혈로 이어진 도로변엔 금속판으로 된 연천군수 명의의 안내판이 있었다. 군수는 안내판을 통해 연천 풍혈이 “전체 깊이 16m, 높이 2.2m 규모의 천연 바위굴”이라며 “무더운 여름철 찬 공기가 흘러나와 추운 겨울을 연상케 하고, 반대로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지 않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냉동시설이 없던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잠종(누에나방의 알) 1천여매를 저장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 나무가 ‘흰인가목’이에요.” 풍혈지로 들어서자마자 낮게 하늘거리는 나뭇가지에 달린 작은 이파리들을 가리키며, 길희영 국립수목원 연구사가 말했다. 장미과인 흰인가목은 중국 동북부와 극동 러시아에 주로 분포하는 전형적인 북방계 식물이다. 한반도 내에선 설악산 소청 일대 해발고도 1500m에서 자생할 뿐이다. 과거 빙하기 시기인 2만년 전, 한반도가 지금의 극동 지역과 비슷한 기후였을 때 널리 번성했다. 빙하기가 끝나자 한반도에선 산꼭대기에만 남았다. 설악산 소청 일대보다 1200m나 고도가 낮은 이곳에 흰인가목이 살아남은 건 온전히 냉기를 발산하는 풍혈 덕이다.

풍혈지는 풍광이 주변과 확연히 달랐다. 서늘하고 습해 이끼가 가득했다. 솔잎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모습의 향나무솔이끼와 산솔이끼들이 바닥에 카펫처럼 깔렸다. 아주 작은 크기의 소나무 숲을 대하는 듯했다. 곳곳엔 고사리도 보였다. 주저리고사리라 부르는, 고산이나 풍혈지에서만 볼 수 있는 북방계 식물이다. 한반도에만 있는 특산식물이자 역시 북방계 식물인 매자나무와, 개나리를 똑 닮은 장수만리화도 있었다. 장수만리화는 북한 황해도 장수산에서 처음 발견된 한반도 특산종으로, 꽃향기가 만리까지 퍼진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축 처지는 개나리와 달리 가지가 곧추서는 게 특징이다. 모두 풍혈의 냉기에 의존해 이곳에 남은 식물들이다. 기후변화가 진전되면 남한에선 더는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국립수목원은 이들 식물에 일일이 ‘기후변화 모니터링’이라 쓴 표찰을 달아놓았다. 이들의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 맺는 각각의 생장 시점을 관찰해 한반도 기후변화의 참고 지표로 쓰기 위함이다.

경기 연천 동막리 풍혈의 ‘주저리고사리’. 연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경기 연천 동막리 풍혈의 ‘주저리고사리’. 연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잠시 한자리에 서 있는 동안 한쪽 뺨이 서늘해졌다. 흡사 문을 열어놓은 냉장고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솔이끼 틈 사이로 난 바위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구멍 안 손가락에 닿은 돌의 감촉이 매우 차가웠다. 안종빈 연구원은 “더러 인근 논밭 주인이 풍혈지를 천연 냉장고로 쓰기도 한다”고 했다. 동행한 수목원 연구원들은 종자 채집을 하고 열화상 카메라를 단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내려다본 풍혈의 온도를 확인했다. 각각 20, 40, 60, 80m의 수직 지점에서 촬영한 화면에선 풍혈의 낮은 온도가 확연했다. 일행이 선 풍혈지 온도가 가장 낮은 3.3도, 풍혈 주변 햇볕이 비치는 곳의 온도가 13.1도였다. 거의 10도 차이가 났다.

보호받지 못하는 천연박물관 풍혈지는 인류가 지금처럼 번성하게 된 온난 기후의 지질시대인 ‘홀로세’ 직전 ‘플라이스토세’ 시기에 형성됐다. 당시 빙하기 때 산사면에 쌓인 얼음 위로 암석이 퇴적돼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풍혈은 특유의 기후조건 덕에 다양한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 구실을 한다. 희귀식물이 발견되는 곳이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지속적인 관찰을 해야 하지만, 전국 25곳의 풍혈 중 3곳이 희귀식물 자생지로 지정됐을 뿐이다. 이날 일행이 찾은 연천 풍혈도 배 농사 중인 인근 사유지를 거쳐야 갈 수 있었다. 풍혈지조차 이들 배 농장주의 사유림이었다. 농장주가 사유지인 것을 이유로 접근을 막거나 풍혈지를 개발해 훼손해버려도 달리 손쓸 방법이 없다. 국립수목원에 따르면 전국 25곳의 풍혈지 중 15곳만 국가나 시·군이 소유한 국공유림에 있다. 나머지 10곳은 개인이나 종교단체, 종중 명의였다.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의 온도를 열화상 카메라로 측정 중이다. 제일 낮은 곳의 온도가 영상 3.3도, 높은 곳의 온도가 12.1도로 나타났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의 온도를 열화상 카메라로 측정 중이다. 제일 낮은 곳의 온도가 영상 3.3도, 높은 곳의 온도가 12.1도로 나타났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철망을 둘러 접근을 차단하는 보호 조처가 이뤄진 곳은 산림청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강원도 홍천의 풍혈뿐이다. 이날 오후 취재진은 홍천 방내리 풍혈로 향했다. 홍천 풍혈도 논밭 주변 임야의 비탈면에 있었다. 연천과 달리 국유림에 있어 땅 주인의 허락을 받을 일이 없었다. 둘러친 철망 한구석 자물쇠 걸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통 이끼를 두른 바위들이 누렇게 마른 덤불 사이에 놓여 있었다. 타조의 깃털을 닮았다는 타조이끼들이 무리 지어 달리는 타조 떼처럼 바위들을 덮었고, 한쪽엔 베개 충전재로도 쓴다는 털깃털이끼가 그득했다. 사이사이 난 구멍으로 낯선 동물이 기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다. 열화상으로 확인한 온도는 영상 0.7도, 주변은 12.8도였다. 이곳에선 극지방이나 북유럽, 북극과 가까운 북미 침염수립대 주변에 주로 자라는 월귤이 모여 산다.

월귤은 바닥에 낮게 깔려 작고 두꺼운 달걀형 이파리들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었다. 한겨울에도 푸른 상록성 관목으로, 북유럽에선 우리의 잔디처럼 흔하다. 열매를 모아 잼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에선 오직 이곳과 설악산 고도 1600m 이상에서만 볼 수 있다. 기후변화로 전 지구 남방한계선상의 월귤 개체수가 줄고 있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월귤을 최소관심(LC) 등급으로 적색목록에 등재해놨다.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한국에선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돼 있다. 안종빈 연구원은 “몇년째 관찰 중이지만 수목원 연구진들도 월귤의 결실(열매)을 본 이가 없다”고 했다. 이곳에도 곳곳에 식물 모니터링을 위한 붉고 노란 깃발이 꽂혀 있었다.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에서 자생하는 월귤과 월귤꽃. 월귤은 극지방과 북방침엽수림대 주변에 자라는 종으로 국내에서는 설악산과 홍천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강원 홍천 방내리 풍혈지에서 자생하는 월귤과 월귤꽃. 월귤은 극지방과 북방침엽수림대 주변에 자라는 종으로 국내에서는 설악산과 홍천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홍천/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가장 마지막 빙하기인 최후빙기가 끝난 뒤 간빙기로 접어들며 지구 기온은 서서히 올랐다. 1만2천년 전 현재의 온도까지 오른 뒤 지금까지 일정 수준을 유지했지만,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고 100여년 동안 1도가량 올랐다. 최후빙기에 한반도에 자리잡은 북방계 식물들 가운데 일부는 한라산과 설악산, 지리산 등에 드문드문 섬처럼 남았다. 냉기를 뿜어대는 풍혈에 의지해 살아남은 식물들은 지구 기후가 계속 변하면 견디지 못하고 고사하게 된다.

공 교수는 “풍혈지의 식물은 한반도 식물의 기원과 전파, 생존을 설명해주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자 기후변화에 취약한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라며 “고기후와 자연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보전 조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연천·홍천/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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