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이 출범한 1986년 유럽은 광우병 공포에 휩싸였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양의 내장을 사료로 먹인 결과였다. 이윤과 효율만 앞세우는 산업형 농업의 민낯이 드러났다. 같은 해 이탈리아 언론인 카를로 페트리니 등은 로마에 진출하려던 맥도널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서 탄생한 대안 먹거리 운동인 슬로푸드 운동은 세계로 퍼져, 160개국에 10만여명의 회원과 1500개 지부를 뒀고 우리나라 등 10개국에 국가 협회가 만들어졌다.
2015 슬로푸드 국제페스티벌 행사의 하나로 20일 서울시 교육연수원에서 2015 대안농정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해 ‘농업 없이 도시 미래 없다’는 강연을 한 카를로 페트리니 국제슬로푸드협회장과, ‘건강한 삶의 특별시, 서울의 건강한 먹거리’를 발표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따로 만나 대담을 나눴다.
박원순
도시텃밭은 단순 식량생산 넘어
즐기고 행복 얻는 치유 공간
서울 골목마다 작은 상자나 화분에
고추 따위 작물들 키워
시골 어머니 서울 오시면
낮잠 중에 닭 쫓는 잠꼬대까지
박원순 시장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도시농업이나 슬로푸드 운동을 펼치는 게 쉽지 않다. 아까 발표를 듣고 혹시 조언이나 제안이 있으면 해 달라.”
페트리니 회장 “슬로푸드 운동은 시골과 대도시, 부유한 곳과 가난한 곳 가리지 않고 발전해 왔다. 도시든 시골이든 음식문화는 모두 농촌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동안 먹거리 환경이 급변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했다. 모든 대도시가 비슷하다. 서울시가 하고 있는 시골과 도시 농업을 다시 연결하려는 노력 등은 아주 훌륭하다. 조언한다면, 아이 때부터 생각을 바꿔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박 시장은 앞서 한 강의에서 “왜 서울시장이 농업 이야기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농민의 아들이기도 하고 농업 살리기를 고민한 시민운동가로서 좀 자격이 있다”며 농업과 도시는 하나로 연결돼 있어 먹거리 문화를 통해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최근 들어 급락했으며 농업인구와 쌀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농업인구 고령화는 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서울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1년부터 서울시에 도시텃밭을 늘려 지난해까지 4배로 늘렸다며 “서울시의 모든 건물 옥상에 태양광 패널 아니면 텃밭이 조성되도록 하고 드론(무인기)을 띄워 점검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원순 “도시텃밭은 단순히 식량을 생산하는 곳을 넘어 즐기고 행복을 얻는 치유의 공간이다. 서울은 자살률 높고 고독사와 이웃과의 관계 단절이 심한 도시 아닌가. 그런데 아파트 옥상에 배추밭을 만들면 물 주고 가꾸면서 서로 얘기 나누고 관계를 만들어간다. 도시텃밭 운동을 시가 시작했지만 이제 시민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흐름이 느껴진다. 이웃 아파트로 번져간다. 가끔 이런 곳에 가면 옥상에서 재배한 커다란 수박을 선물하기도 한다. 금천구에선 마치 김해평야처럼 널따란 옥상 배추밭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도시농업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생각한다. 도시농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페트리니 회장의 말에 동의한다. 사람 의지만 있다면 도시에도 땅, 물, 햇볕 같은 자원은 얼마든지 있다. 비어 있는 땅도 의외로 많더라.”
페트리니
땅 망가뜨리고 괴롭히면 미래 없어
먹거리 맛 모양 가격에만
관심 기울이는 건 ‘먹거리 포르노’
한국 세계 최고 발효기술 보유
노인의 지혜와 기술 배우고
전통과 재료, 서둘러 기록·보호를
페트리니 “아프리카에서도 저녁에 텔레비전을 켜면 프라이팬을 든 사람이 나온다. 요즘 셰프는 인기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요리를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농부에게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농업이 없다면, 재료가 오염돼 있고 유전자 조작돼 있다면 맛있는 요리도 존재할 수 없다.”
페트리니는 오늘날 사람들이 농업에는 무관심하고 먹거리의 맛, 모양, 가격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먹거리 포르노’라고 비판하곤 한다. 슬로푸드 운동은 음식을 넘어 농업에 대한 운동이어야 한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9년 발표한 선언문에서 질 좋은 음식이 되려면 좋은 재료와 숙련된 기술로 만들고(좋은), 환경과 동물복지, 생물다양성, 건강까지 고려하며(깨끗한), 노동조건과 정당한 보수, 연대와 공감, 문화다양성 존중(공정한)을 만족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했고 농업은 가장 빨리 몰락한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슬로푸드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
페트리니 “땅을 망가뜨리고 괴롭힌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농부의 피와 농업을 살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요즘 사회는 노인, 중년, 젊은이가 너무 나뉘어 있다. 세대간 관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젊은이는 경험 많은 노인으로부터 배우고, 노인은 젊은이의 힘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노인은 가족 안에 함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은 이미 몸속에 슬로푸드 디엔에이(DNA)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이 와서 슬로푸드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의 역사와 문화를 보라.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말을 실감할 것이다. 박 시장의 부모와 그 부모는 모두 슬로푸드 실천가들이었다.”
박원순 시골에서 어머니가 서울 오시면 농사지을 생각에 못 견뎌 하신다. 낮잠 주무시면서 닭 쫓는 잠꼬대까지 하신다. 서울 골목길에 가보면 작은 상자나 화분에 고추 따위 작물을 심은 것을 흔히 본다. 도시농업을 말하기 전에 이미 농업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 있다. 단지 정책과 제도로 보장하지 못했을 뿐이다.”
페트리니는 앞선 강의에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발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런 문화를 잃고 있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노인으로부터 농업생산물을 어떻게 가공하는지 지혜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학생 500명에게 강의하고 앞으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있느냐면 한두 명이 손을 든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그의 서울대 강의에서 100여명 가운데 농사를 짓겠다는 이는 여학생 한 명이었다.
페트리니 “슬로푸드라고 해서 식탁에 네 시간씩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슬로푸드라고 천천히 하라는 게 아니다. 노인만 알고 있는 전통과 기억, 재료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기록하고 보호해야 한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