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리고 있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활동가들이 ‘화석연료 종식’이라고 쓴 팻말을 놓고 시위를 하고 있다. 두바이/로이터 연합뉴스
“이 비굴한 초안은 마치 석유수출국기구(OPEC·오펙)의 요구를 또박또박 받아쓴 것처럼 보인다.”
기후운동가로 활동 중인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지난 11일(현지시각)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의장국인 아랍에미리트가 ‘전지구적이행점검(GST) 합의문’ 초안을 공개한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파리협정에서 약속한 ‘지구 온도의 상승 1.5도 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이 시급한데 초안에 이 문구가 빠진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번 총회가 완전히 실패 직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2일 오전 11시로 예정됐던 폐막식을 미루고 협상을 이어갔지만, 고어 전 부통령의 말마따나 합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초안이 공개된 직후,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수 나라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라들까지 나오고 있다.
작은 섬나라 국가연맹’의 의장인 사모아의 세드릭 슈스터는 공개된 초안을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에 대한 사망진단서”라고 표현하며 “우리는 사망진단서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폐기한다는 약속이 없는 협정에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가디언이 이날 보도했다. 크리스 보언 오스트레일리아(호주) 기후변화부 장관도 그의 말에 공감을 표하며 “우리는 그 사망진단서에 공동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언 장관이 미국과 노르웨이, 캐나다 등 비유럽 선진국 모임인 ‘엄브렐러 그룹’을 대표해 발언에 나선 만큼, 이대로라면 최종 합의안 도출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무게를 실었다.
당사국들이 이처럼 반발하고 있는 건, 전날 예정보다 10시간이나 늦은 오후 4시30분께 공개된 전지구적이행점검 합의문 초안에 ‘화석연료의 생산과 소비를 줄인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어서다. 그간 국제 기후 협상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퇴출’(phase-out)할 것인가, ‘단계적으로 감축’(phase-down)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는데, ‘감소’(reduce)란 새로운 문구가 등장하며 기존 논의들보다 더욱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서다.
일단 ‘퇴출’은 먼 미래 어느 시점에선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가 아예 ‘0’(중단)이 되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고, ‘감축’은 일단 ‘줄여보자’는 데 방점이 찍힌 것이다. 김소민 기후솔루션 연구원은 “이번 초안은 (그 어떤 의무화 조항도 없이) 화석연료 생산·사용을 줄이라(reduce)고 ‘촉구’한 수준에 지나지 않아, 기후위기 대응을 ‘각국의 선택사항’에 불과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초안이 나오게 된 건, 산유국들의 강한 반발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오펙은 지난 6일 이례적으로 회원국 등에 “(온실가스) 배출이 아닌 화석연료를 대상으로 한 어떤 (합의) 문구나 해법도 적극적으로 거부하라”고 촉구까지 한 바 있다.
실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들은 그간 ‘단계적 퇴출’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화석연료’가 아니라 ‘화석연료 배출’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고까지 주장해왔다. 산유국의 주장은 온실가스를 포집해 지층 깊숙이 저장하는 탄소포집 및 저장(CCS) 기술 등을 사용하면, 석탄·석유·가스 등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출량을 줄이는 기술에 방점이 찍힐 경우, 시시에스를 동반한 신규 가스전 사업 등에 대한 지원이 도리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 때문에 당사국총회 합의문 초안에 처음으로 석탄·석유·가스를 포괄한 화석연료란 문구가 들어갔음에도, ‘감소’라는 표현을 두고 논란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유럽연합의 봅커 훅스트라 기후담당 집행위원은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요구하는 국가가 대다수”라며 “지금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할 10년”이라고 강조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두바이/기민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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