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9일 전북 진안에서 한 농민이 병충해로 말라붙은 고추를 살피고 있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경북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60대 정아무개씨는 최근 이상기후 탓에 40년간 농사를 지으며 체득한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올해는 자연의 주기가 완전히 뒤죽박죽이에요. 상상도 못 했을 때 포도 꽃이 피니까, 앞으로 어떻게 예측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같은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40대 진아무개씨도 갈수록 절기에 맞지 않는 기상현상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1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절기 따라 ‘이 시기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게 있었는데, 과거 영농일지에 작성해뒀던 걸 보면 지금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농어민은 기후위기를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다. 이들은 이상기후로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기도 한다.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농민들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국가기관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23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최근 공개한 ‘기후위기와 농어민 인권에 관한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농어민 응답자의 88.6%가 기후변화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96.1%는 이상 기상현상의 원인이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의견에 동의했고, 92.4%는 기후변화 현상을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매우 심각하다’고 답한 사람은 40.5%에 달했고, ‘심각한 편이다’라고 답한 사람은 51.9%였다. 전체 응답자로 계산하면, 농어민 10명 가운데 8명이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셈이다.
인권위 의뢰로 이번 실태조사를 벌인 김흥주 원광대 교수(복지·보건학부) 등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농어민들이 어느 직종 종사자들보다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지난 9월19일~10월14일 전국 만 19살 이상 농어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였다.
농민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시설 피해보다는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업 부문 피해는 ‘기온 상승으로 인한 병해충 발생’이 3.38점으로 가장 높았고, ‘풍수해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3.36점으로 뒤를 이었다. 이는 ‘시설재배시설, 축산시설의 온도 및 환경 유지를 위한 비용 증가’(3.28점), ‘풍수해로 인한 농축산 피해’(3.27점)보다 높은 수치다. 연구진은 농민들이 피해와 관련해 심각하다고 느끼는 정도를 1~4점 사이 점수로 물어 이런 결과를 얻었다.
어업 부문 피해는 ‘수온 상승으로 인한 유해생물(적조, 해파리) 증가에 따른 어업 손실’이 3.45점로 가장 높았다. 어업 부문에서도 ‘해수 온도 상승으로 인한 회유성, 정착성 어종의 서식지 및 어장 변화’(3.37점), ‘폭염에 의한 양식생물의 질병 발생 증가, 성장 및 생산량 감소’(3.34점) 등이 ‘태풍 해일에 의한 어업시설 피해’(3.26점)보다 높게 나타났다.
반면 기후위기를 둘러싼 농어민의 대응능력은 1.87점에 그쳐 피해 정도에 비해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기후변화 피해 발생 시 활용할 수 있는 지원 정책에 대해 알고 있다’ 등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보 파악 수준과 경제적인 여건 등에 관해 물어 1~4점 사이 평균 점수로 나타낸 결과다. 연구진은 농어민이 기후위기를 심각하고 느끼고 있고, 이에 따른 큰 피해를 겪고 있지만 대응능력은 부족하다며 이들을 지원할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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