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민달팽이유니온 등으로 구성된 재난불평등추모행동 회원들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폭우 희생자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열어 주거 취약 계층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기후위기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후위기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 재난은 모두에게 동등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린다. 장애인, 쪽방촌 주민, 농어민, 건설노동자 등은 기후위기 최일선에서 재난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오는 24일 3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기후위기 관련 집회인 9·24 기후정의행진을 앞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들이 경험한 기후위기 상황과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려는 이유 등을 두차례에 걸쳐 전한다.
유진우(27)씨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소외된 자, 배제된 자와 함께한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했다. 11살 때부터 품어온 꿈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뇌병변장애가 있다. 근육 강직으로 스스로 걸을 수 없어, 전동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한다. 학교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움직였고, 교회는 장애인을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사회적 차별 속에서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학교를 자퇴했다. 16년 동안 키워온 꿈과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세상은 그의 꿈만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기후위기 최일선으로 그를 내몰고 있다. 지난 8월8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살던 40대 발달장애인 홍아무개씨 등 일가족 3명이 폭우로 고립돼 집 안에서 숨진 사건을 접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왜 장애인들은 이렇게 쉽게 죽음과 맞닿아 있는 걸까.’ 앞서 지난해에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옥탑에 살던 30대 장애인이 폭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기후재난은 장애인들에게 실질적 위협으로 작동한다. 유씨는 “이분법적으로 나누긴 싫지만,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달리 기후재난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이 물이 차오르는 집에서, 폭염이 내리쬐는 옥탑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숨질 위험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반지하·지하 공간, 또는 옥탑에 사는 장애인들이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0년 벌인 장애인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대면조사한 장애인 7025명은 지상(97.3%), 지하(1.6%), 반지하(1.1%), 옥탑(0.1%) 순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해 등록 장애인 수가 262만2950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반지하와 지하·옥탑에 사는 장애인(2.8%)은 약 7만3442명으로 추산된다.
유진우(27)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본인 제공.
유씨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장애인들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원받는 주거비 30만원 정도로는 반지하 등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장애인들이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설령 알더라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개인별로 장애 특성에 맞는 활동보조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목소리를 내기 위해 24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과 숭례문(남대문) 일대에서 열리는 ‘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할 예정이다. “‘부자 감세’를 하면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주거 정책은 내놓지 않고 있는 정부를 향해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날 행진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당신 옆에 장애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기후정의행진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행사다. 360여개 기후·환경·시민단체로 꾸려진 ‘9월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가 마련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힘을 모으자는 취지에서다. 행사는 집회와 행진, 문화행사 등으로 이뤄진다. 2019년 서울에서 처음 열린 기후정의행진에는 약 5천명이 모였다. 조직위는 이번에는 최소 2만명이 함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국에서 ‘9·24 기후정의행진 상경단’도 꾸려졌다. 참석자들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가지다.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하고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하며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장인 이드(활동명·35)도 이날 광장에 설 계획이다. 그는 “성소수자 운동 중심 슬로건이 ‘우리가 여기 있다’인데, 사회적으로 소수자에 놓인 한 사람으로서 기후정의행진에 함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7월 퀴어문화축제에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목소리를 냈다. 기후정의행진도 착취되고 배제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자는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퀴어퍼레이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드(활동명·35)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장. 본인 제공
그 역시, 신림동 다세대주택에서 침수로 숨진 장애인 일가족 사건을 통해 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고 했다. “폭우로 숨진 분들과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며 먼저 떠나보낸 동료들이 겹쳐 보였어요. 모두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란 점도 그렇고, 열악한 주거환경이나 사회와 단절된 채 고립된 삶을 사는 점도 닮아 있어요.” 그 역시 7년 전 신림동 반지하 집에서 살았다.
그는 성소수자 가운데 반지하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 처한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의 노동권이 잘 보장되지 않아 소득이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커밍아웃이 원활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다 보니 혼자 사는 분들도 많고요.” 성소수자주거권네트워크가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만 19살 이상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2021년 벌인 연구를 보면, 조사 대상 949명 가운데 지하(반지하 포함)층에 사는 이들과 옥탑에 사는 이들의 비율은 각각 6.1%, 1.4%였다. 통계청이 2020년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지하(반지하 포함)층과 옥탑에 사는 가구 비율은 각각 1.6%, 0.3%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견줘 보면, 불안정한 주거환경에 처한 성소수자 비율이 높은 것이다.
서울 중구 양동쪽방촌 주민인 박종만(62)씨. 본인 제공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인 이들은 기후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박종만(62)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서울 중구 양동쪽방촌에 산다. 월세는 28만원이다. 그는 쪽방촌 주민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쪽방은 통풍과 단열에 취약하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폭염과 한파, 폭우 등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복지 문제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후 문제가 심각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려는 이유다.
그는 “신림동 침수 사고 때 쪽방촌 한 주민이 ‘누구 하나 우리에게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도 (비가 많이 온 지역) 반지하에 살았다면 그냥 죽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토로했다”고 전했다. 박씨가 느낀 두려움도 다르지 않았다. 이달 초 11호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을 때도 이곳 주민들은 깨질 듯이 요동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서울시 자료를 보면, 지난 5월 기준으로 2453명이 돈의동·창신동·동자동·영등포동·남대문 일대 쪽방 밀집지역에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일상의 문제다. 쪽방촌 주민들은 기후정의행진을 앞두고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1017 참가단’을 꾸렸다. 1017은 1992년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인 10월17일을 의미한다. 빈민단체들은 이날에 맞춰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운동을 이어왔다. “기후위기와 빈곤·불평등의 뿌리는 같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박씨를 비롯해 쪽방촌 주민들이 기후정의행진에서 이렇게 외칠 계획이다.
기후위기는 인권의 문제이자 불평등의 문제이며, 인류 생존의 문제라고, 기후정의행진을 앞둔 이들은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민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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