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녹색당이 친원전으로 유턴했다고? 그럴 리가….’ 눈을 의심했다.
지난달 29일 아침 신문을 훑다 <국민일보> 4면 “석탄 다시 때는 유럽…‘탈원전’ 독(일) 녹색당도 친원전 유턴”이라는 제목과 기사를 봤을 때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 어느 정당보다 탈원전에 앞장서온 독일 녹색당의 이력과 상징성을 고려할 때, 수긍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리셋! e 에너지 안보’라는 문패를 단 시리즈 첫 회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일보는 이날 관련 기사들을 1면 톱, 4~5면 전면에 걸쳐 비중 있게 보도했다. 5면 기사 제목은 “에너지 92%, 해외 원료 의존…‘준국산’ 원전 불가피론 확산”으로 “(한국은) 불안정한 에너지 환경 속에서 단기적으로 원전 활용률을 높이는 게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는 내용을 담았다. ‘탈원전’ 원조 격인 독일도 친원전으로 유턴하는 마당에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당연히 원전 활용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로 읽힐만한 기사였다. 윤석열 정부의 원자력 발전 확대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했다.
독일 녹색당이 친원전으로 유턴을 했는지에 대해 유럽 쪽 취재원에게 이메일을 통해 물어봤다. 역시나 아니었다. 국민일보가 보도한 내용은 ‘독일 녹색당’이 아니라, ‘핀란드 녹색당’의 이야기였다. 국민일보는 보도 이튿날인 30일 해당 기사의 온라인 제목을 “석탄 다시 때는 유럽…핀란드 녹색당도 친원전 유턴”으로 바꿨고 내용도 수정했다. 애초 기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안보’가 국제 사회의 열쇳말이 된 상황에서 친환경을 강조하던 유럽 나라들이 석탄 발전을 다시 하게 되면서, 원전 확대 움직임도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보였다. 이에 대해 환경운동가 출신인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일보의 보도는 잘못된 정보로 여론을 호도하려는 정치적 행위로 느껴진다”며 “오보에 대해 온라인 제목과 내용만 살짝 바꿀 것이 아니라 사과와 정정보도를 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연립정부 구성 녹색당, 결국 ‘원자력법 개정’ 끌어내
지난해 독일 총선에서 14.8%의 정당득표율 획득한 녹색당은 연방의회 전체의석 735석 중 118석을 얻었다. 사회민주당(25.7%)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기민-기사연합·24.1%)에 이은 원내 3당이 됐다(2017년 총선 때는 원내 6당이었음). 녹색당은 총선 당시 “원자력은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며 “우리는 독일에서 탈원전을 완료할 것”이라는 공약을 제시했다. 이런 공약은 녹색당 태동 때의 정체성과 일관되게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독일 반원전 운동의 역사는 원자력 발전 체제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다. 소련의 원자력 기술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을 천명했다. 이에 독일도 미국 원자력 기술의 혜택을 받게 됐다. 독일 정부는 1973년 석유파동 직전, 1985년까지 원자력 용량을 20배 증가시켜 원전 전력 비중을 35%까지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원자로 40기 증설 계획을 내놨다.
이런 정치·산업계와는 달리 시민사회에서는 1960년대 들어 원전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이 공기와 지하수를 통해 지역을 오염시킬 수 있고, 원전 냉각탑이 뿜어내는 연기로 주변 농장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우려 등이 예정 부지 주민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이렇게 발전소 예정 부지에서 시작된 반대운동은 원전 건설이 증가하면서 1970년대 초 독일 전역으로 확대됐다. 처음엔 ‘우리 지역엔 원전 건설을 반대한다’처럼 님비(Not In My Backyard)적 성격이 있었던 원전 반대운동이 1970년대에 들어서는 독일 어떤 지역에서도 원전을 건설해서는 안 된다는 전국적 차원의 반원전 운동으로 진화했다.
독일의 에너지원별 발전 비중. 맨 오른쪽 2021년의 경우 위에서부터 석탄 29%, 풍력 19.9%, 가스 15.7%, 원전 11.8%, 태양광 8.6%, 바이오매스 8.5%, 석유등기타화석연료 3.5%, 수력 2.9%. 출처: 영국의 글로벌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
녹색당은 1979년 전국 정당으로 출범했다. 반핵운동을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이 녹색당의 토대였다. 이 정당은 1983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27석(모두 비례대표 의석)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이로써 반원전·탈핵이 제도권 내에서 논의되고 새로운 정책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로 반원전 운동은 격화됐다. 이후 1998년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녹색당은 원전 폐쇄를 핵심 연정 구성 조건으로 제시했다. 2000년 6월14일 연립정부와 원전 운영사 간에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한다는 ‘원자력 합의’가 이뤄졌다. 이 합의는 원자력법 개정으로 이어져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됐고, 과거로의 회귀는 어렵게 됐다. 이로써 당시 세계 4위의 원전 대국으로 자국 전력의 30%를 20기에 달하는 원전을 통해 충당하던 독일은 역사적인 탈핵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런 독일 사회에 또 다른 변화가 전개된 것은 2009년 기민-기사연합이 자유민주당과 보수연정을 출범시킨 뒤부터다. 앙켈라 메르켈 총리는 재생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원전이 징검다리로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2010년 운영 중인 원전 17기의 수명을 각각 8~14년 연장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1년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메르켈 총리는 수명연장 정책을 폐기했다. 준공된 지 30년이 넘은 노후 원전 등 8기를 폐쇄하고, 나머지 9기는 2022년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원전을 둘러싼 30년 넘는 사회 갈등이 매듭지어졌다. 지난해 12월31일 독일은 원전 3기를 폐쇄했다.
독일 북부 에머탈에 있는 그론데 원자력 발전소의 냉각탑에 2021년 12월30일(현지시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회원들이 "원자력 없는 유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조명으로 비추고 있다. 독일은 31일자로 에메르탈 원전을 포함해 모두 3개 원전의 가동을 중단했다. EPA=연합뉴스
독일은 마지막으로 남은 원전 3기를 올해 말 정지할 예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초래한 에너지 위기로 독일 원전 수명 연장 가능성이 일각에서 제기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회의적이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원전 수명연장을 위해서는 몇 년 동안 사전 준비를 해야 하고, 안전규제기관으로부터 굉장히 엄격한 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그런데 올라프 숄츠 총리(사민당)와 로버트 하벡 연방 경제기후보호장관(녹색당)이 반복적으로 언론에 이러한 내용(탈원전 기조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전 수명연장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녹색당은 의회의 총의석 200석 중 20석(10%)을 차지하고 있는 원내 5당이다. 내무부장관·외무부장관·환경기후부 장관으로 내각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정당은 지난 5월22일 당대회를 열어,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접근 방식의 하나로 원전이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며 원전을 사실상 지속 가능한 전원으로 간주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한 안전을 전제로 기존 원전 사용 연장, 소형모듈원자로(SMR) 승인 절차 간소화를 위한 원자력법 개정 등의 내용을 담은 ‘2023~2027년 정치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녹색당은 전통적으로 탈핵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핀란드 녹색당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그 배경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핀란드의 기후위기 대처와 원전 활용 상황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견줘, 두 가지 측면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하나는 핀란드가 ‘2035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행계획을 실행 중이라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이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목표한 ‘2050년’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5년이나 빠르다. 다른 하나는 핀란드 소도시 에우라요키 인근에 사용 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영구처분시설을 조성해 2025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약 5500톤의 사용 후 핵연료를 약 10만년 동안 지하 430m 깊이의 땅속에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지역 주민 반대 등으로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사용 후 핵연료 처분 시설을 가동하지 못했다.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이런 시설 가동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 독일, 세계의 원자력 발전 비중. 맨 오른쪽 2021년의 경우 위에서부터 핀란드 32.8%, 독일 11.8%, 세계 10%. 세계의 원전 비중은 줄어드는 추세다. 출처: 영국 글로벌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
지난 20년 동안 독일은 전기 생산에서 원전 비중을 꾸준히 줄여온 반면, 핀란드는 30% 안팎의 원전 비중을 줄기차게 유지해왔다. 핀란드는 현재 5기의 원자로를 운영중이다. 영국의 글로벌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의 자료를 보면, 2001년 각 나라의 전력 발전량 가운데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독일 29.4%, 핀란드 30.7%로 두 나라가 비슷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2021년 기준 독일은 11.8%로 3분의1로 줄어든 반면, 핀란드는 32.8%로 오히려 증가했다. 핀란드의 에너지원별 발전 비중은 원전에 이어 수력 21.8%, 바이오매스 18.8%, 풍력 11.4%, 석유 등 기타화석연료 5.9%, 가스 5%, 석탄 4% 순이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원전을 활용해왔다. 핀란드는 오는 6일(현지시각)로 예정된 유럽연합 의회 본회의 녹색 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투표에서 원전이 녹색 분류체계에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원전을 통한 전기 생산 비중이 70% 이르는 프랑스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도 핀란드와 같은 입장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핀란드는 현재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고, 그 대처 방안으로 원전을 주요한 에너지원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바이오매스가 온실가스량을 늘리는 등 기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과학적 근거들이 나온 점도 핀란드의 원전 의존을 부추긴 요소로 꼽힌다. 핀란드는 그동안 전기 생산을 위해 바이오매스에 크게 의존해왔다. 독일 국민에 견줘 상대적으로 원전에 덜 비판적인 국민의 태도도 핀란드의 원전 정책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해석된다.
핀란드의 에너지원별 발전 비중. 맨 오른쪽 2021년의 경우 위에서부터 원전 32.8%, 수력 21.8%, 바이오매스 18.8%, 풍력 11.4%, 석유등기타화석연료 5.9%, 가스 5%, 석탄 4%. 출처: ‘엠버’
라우리 뮬리비르타 핀란드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 수석 애널리스트는 <한겨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독일에서는 원전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정부가 원전에 의존하는 ‘넷제로’(탄소 순배출 0)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면 성공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탄소 배출 제로로 가는 길은 기술·경제적 차이, 사회·정치적 차이에 따라 나라마다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 탐페레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핀란드 녹색당은 글로벌 기후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목표 아래 원전 활용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견해가 예전엔 핀란드 녹색당 안에서 소수의견이었는데, 이제는 다수의견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 활동가는 “녹색당은 기본적으로 탈핵 운동과 에너지 전환 등을 기본강령으로 해서 출범한 정당”이라며 “아무리 러시아 사태(로 인한 에너지 위기)를 고려한다 해도 핀란드 녹색당이 이번에 원전 수명연장이나 소형모듈원전(SMR) 승인 간소화 등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참고자료 -박진희, 독일 탈핵정책의 역사적 전개와 그 시사점, 역사비평, 2012-김수진, 정치로 탈원전의 해법을 찾은 독일, 시사인, 2017.7
김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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